30대 세입자 "집주인 연락두절" 뜬눈 …중개소 "계약 0건" 한숨

연규욱 기자(Qyon@mk.co.kr) 2023. 1. 1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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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왕 최대 피해지역 화곡동 가보니

◆ 전세사기 공포 ◆

전세사기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며 다세대·연립주택 전세를 찾는 청년층이 크게 줄고 있다. 사진은 대규모 전세사기가 벌어진 서울 화곡동의 다세대·연립주택 밀집지역 전경. <이충우 기자>

다세대·연립주택과 단독주택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저층·단독주택이 신축 빌라(다세대주택)로 하나둘씩 재건축돼 가며 전국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아진 곳(법정동 기준)이다. 그러나 신축 빌라가 많아질수록 드리워지는 그림자도 커졌다. 다름 아닌 전세사기. 지난해 10월 숨진 채 발견된 빌라왕 김 모씨는 화곡동에서만 빌라 122채를 소유하고 있었다. 한날한시에 화곡동에서만 최소 122명의 전세사기 피해자가 발생한 것이다.

13일 찾아간 화곡동 골목은 최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반영하듯 한산한 모습이었다. 인근 신축 빌라를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 있는 집들이 다 김씨 소유 빌라"라고 알려준 우장산동(법정동 화곡동) 소재 A공인중개사 대표는 "내놓는 물건도 없고, 찾는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전세사기 피해가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화곡동 일대는 거래 씨가 완전히 마른 모습이다. 화곡동 소재 공인중개사 관계자들은 전세 거래가 완전히 끊겼다고 토로했다. 화곡1동 빌라 밀집 지역에 자리 잡은 B공인중개사 대표는 "올 들어 계약을 딱 두 건 했는데, 모두 월세였다"며 "빌라왕 사태 이후 전세 계약은 수개월간 단 한 건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월세 물건을 찾으면서도 계속 안전한지 묻는다"고 덧붙였다.

우장산동 소재 또 다른 공인중개사 사무소는 텅 비어 있는 사무실에 중국음식점 메뉴가 적힌 입간판이 놓여 있기도 했다. 최근 테이블 등 새롭게 인테리어를 한 흔적도 엿보였다. 길 건너편 화곡본동 소재 C공인중개사 대표는 "언제가 마지막 빌라 거래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며 "지난해 여름 경찰이 전세사기 단속을 시작한 이후 신축 빌라 전세 거래는 아예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 공인중개사들에 따르면 신축 빌라는 개발사업 자체가 '올스톱'됐다. B공인중개사 대표는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건축업자들이 빌라 지을 땅을 문의하러 자주 부동산에 들락날락했는데, 지금은 자취를 싹 감췄다"고 말했다. 그는 "대출을 끼고 20억여 원을 들여 땅을 매입했는데, 분양을 못할 것 같아 땅을 되판 건축업자도 있다"며 "빌라왕 사태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C공인중개사 대표 역시 "지금 낭패를 보고 있는 건축주가 많다"며 "계약금은 집어넣었는데, 분양 실패로 중도금과 잔금을 못 치러 계약이 취소된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한 건축업자는 강서구에 오피스텔을 짓다가 골조 올릴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며 "지금은 파산 신청을 한 상태"라고 전했다. 이 대표는 "그동안 세입자 전세금으로 분양대금을 치르는 방식으로 신축 빌라 사업을 해왔는데, 세입자를 들이지 못하니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빌라 세입자들의 근심은 화곡동에 자리 잡고 있는 전세피해지원센터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국내에서 유일하게 운영하고 있는 화곡동 전세피해지원센터는 세입자들에게 각종 법률 상담을 해주는 곳이다.

근무시간이 한창인 이날 오후 3시에도 이곳에서는 시민 10여 명이 상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센터 관계자는 "전세사기 관련 언론 보도를 접하고 '나도 피해자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오는 사람부터 임대인이 갑자기 연락이 안 된다는 세입자, 전세계약 체결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 등까지 다양한 사람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벌써 2000명을 넘어섰다. 센터 관계자는 "하루 20~30명이던 방문자 수가 특히 빌라왕 사태 이후 40~50명으로 늘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만난 빌라왕 피해자 중 한 명인 이 모씨(30대)는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빌라왕 본인이 아닌 대성하우징(김씨가 대표로 있는 법인) 명의라 이런 경우에도 보증금 반환 청구 소송이 가능한지 문의하러 왔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 집을 소개한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고의 과실이 있는지도 물어볼 계획"이라고 했다. 빌라왕 사건과는 별개 사안으로 상담을 받으러 온 세입자도 여럿 있었다.

센터 한편에서 상담 서류를 작성하던 최 모씨(30대)는 "전세 기간이 만료됐는데 집주인과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라며 "돈을 못 돌려받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문의하러 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빌라 세입자 오 모씨(30대)는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임대인이 아닌 신탁사 소유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즉시 달려왔다"고 말했다. 정부는 전세피해지원센터를 권역별로 추가 설치하고, 여기에 접수되는 전세사기 의심 건은 별도 조사를 통해 경찰청에 수사를 의뢰할 방침이다.

이날 화곡동에서 만난 일부 공인중개사는 정부의 과도한 전세금반환보증 정책이 오히려 전세사기의 자양분이 됐다고 지적했다.

화곡본동 소재 한 공인중개사 대표는 "전셋값이 공시가격 150% 이내면 무조건 전세금반환보증을 해주고, 보증서를 받은 은행들은 쉽게 대출을 남발하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른 것"이라며 "결국 정부 정책이 깡통전세를 양산했고, 빌라왕 같은 악덕업자들이 이를 악용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공인중개사 역시 "잘못된 정책으로 편법(세입자 전세금으로 분양대금 납부)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갖춰졌던 것"이라고 말했다.

[연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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