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롭게, 따뜻하게···‘미미 여사’식 디스토피아[책과 삶]

김종목 기자 2023. 1. 13.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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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의 의식
미야베 미유키 지음·홍은주 옮김|비채|448쪽|1만6800원
미야베 미유키. 비채 제공. (C)Satoshi Toge
미야베 미유키 10년간 쓴 SF단편 모아 펴낸 소설집
로봇 청소기 다정하게 격려하는 아버지···
표제작 ‘안녕의 의식’을 착안

미야베 미유키가 10년간 쓴 SF 단편 8편을 모아 2019년 펴낸 첫 SF 소설집이다. ‘미미 여사의 SF 공간’은 어떤 곳일까. ‘바다 신의 후예’엔 죽은 자들이 일상 노동에서 전장까지 폭넓게 보급된 세계가 등장한다. 사체에서 생명을 만들어내는 프랑켄슈타인 박사 기술이 유출된 뒤 벌어진 세상이다. ‘보안관의 내일’ 배경은 사망한 특정 개인을 닮은 인공물에 인공지능을 탑재한 ‘회귀자’들이 사는 마을이다.

표제작 ‘안녕의 의식’은 일반 가정용으로는 가장 오래된 200년 된 로봇 ‘하먼’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느날 한 여자아이가 하먼을 데리고 로봇 폐기 수속 창구로 온다. 하먼의 기초 기억을 보존해 신규 구입 기체에 이식하기를 바라지만 저작권 보호와 로봇 사용 규제법 때문에 쉽지 않다. 사용 기한을 넘기면 폐기해야 하는 사실에 아이는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하먼이 이 아이를 길러줬기 때문이다. 로봇 수리 기사인 ‘나’는 지나친 의인화로 로봇에게 애정 과잉에 빠지는 사람들에게 화가 난다. 나는 ‘고아’로 구호 시설을 전전하며 살았다. ‘보호 대상 청소년’으로 분류됐다. 나와 달리 한 시설의 어엿한 일원이자 이름을 가진 작업 로봇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로봇을 조립하는 일을 시작했다. 나는 로봇과 헤어지기 괴롭다고 징징대는 손님들을 상대해야 하는 신세다. “내가, 내 손으로 조립한 로봇보다도 필요한 존재가 못 되는 인간임을, 사랑받을 일도 없고 배려받을 일도 없는 인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로봇이 되고 싶다.”

미야베 미유키는 로봇 청소기에 다정하게 격려를 보내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안녕의 의식’을 착안했다고 한다.

대안가족·아동학대·노인문제·감시사회 등 직면한 사회문제
풍성한 SF적 상상력과 성찰적 시선 담아
타임슬립 소재로 쓴 ‘나와 나’는 읽다보면 피식 웃음도

SF에도 ‘사회파 추리’ ‘미스터리’ ‘판타지’ 같은 미야베 미유키를 수식하는 특징은 여전하다. 이번 소설집에서 주요하게 다룬 사회문제는 아동학대다. 한국엔 2016년 번역 출간된 <사라진 왕국의 성>(북스피어)에 이 문제를 녹였다.

‘엄마의 법률’에는 피학대 아동 구제 시스템이 작동하는 세상이 나온다. 국가가 부모 친권을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마더 법’이 시스템의 기둥이다. ‘양가정 매칭을 위한 유전자 분석 기술’과 아동심리학, 교육심리학, 인지심리학 연구 결과를 법에 적용했다. 이 세계에선 ‘골상학’도 부활했다. ‘마더 법 위원회’는 입양아와 양부모의 이목구비가 아니라 골격과 근육이 붙는 방식, 두개골과 턱 모양이 닮았는지 따진다. 목소리가 닮으면 용모는 달라도 ‘닮았다’고 느끼는 걸 고려한다.

마더 법 적용 대상 아이들은 ‘기억 침전화’라는 기본 치료를 받는다. 학대 경험을 기억 깊숙이 가라앉혀 되살아나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다. 기억이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유리 파편’같아진다. 투명해서 어디쯤 가라앉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건전한 양부모’에게 입양될 아이들은 학대를 한 부모나 혈연자 등에 대한 기억도 침전하는 치료를 받는다.

이 시스템은 괜찮아 보인다. 기억 침전화 처치를 받은 입양아 1세대는 지금 ‘건전한 사회생활’을 하는 부모 세대가 되었다. 성인이 되면 ‘마더 법 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일도 없다.

이 제도는 양부모 중 한 명이 죽으면 가정을 해체하지만, 아이들은 주거와 교육 등을 제공하는 ‘그랜드 홈’으로 갈 수 있다.

마더 법 반대파가 존재한다. ‘양육자로서 부적격’이라 판단되면 부모와 아이를 헤어지게 할 수 있는 법 시행 이후 강경한 반대론이 이어졌다. 어느 날 ‘마더 위원회 센트럴 클리닉’ 자원봉사자 한 명이 양어머니가 죽은 뒤 그랜드홈으로 간 열여섯 여자아이 후바코에게 접근한다. 후바코의 기억 침전화 처치 때 일한 인물이다. 그가 마더 법의 비밀 엄수 조항을 어기며 사형수인 생모의 존재를 알려주면서 후바코는 갈등하기 시작한다.

2013년 한국에서 나온 <눈의 아이>(북스피어)에도 실린 ‘성흔(聖痕)’은 아동학대를 더 심층적으로 다룬다. SF 요소는 없다. 살인과 사회관계망서비스 문제를 결합했다. 열네 살 때 생모와 동거남을 흉기로 살해한 뒤 사체를 훼손한 가즈미가 주인공이다. 가즈미는 담임 선생도 죽이려고 교실도 점거했다.

가즈미는 초등학교 입학 무렵부터 엄마와 동거남에게 도둑질과 절도를 강요받았다. 동거남은 ‘훈육’ 명목으로 폭행했다. 가즈미가 철들며 도둑질을 꺼리자 일상적으로 때렸다. 두 사람은 가즈미를 보험금을 노린 고의 교통사고 피해자, 즉 ‘자해공갈 환자’로 만들기도 했다. 동거남은 아동포르노 사이트에 가즈미 알몸 사진을 올리며 손님과 ‘거래’까지 했다. 두 사람은 가즈미가 고발할까 두려워 가즈미 앞으로 보험을 들고 죽일 의논까지 한다.

소설은 가즈미가 스물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 데라시마가 조사 사무소에 사건을 의뢰하면서 시작한다. 가즈미가 어느 교통사고 현장에서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를 제물로 삼아 퇴치하는 괴물, 즉 ‘검은 메시아’를 봤으니 실체를 확인해달라는 것이었다. 미야베 미유키는 아동학대 단죄의 도구로 ‘엄마의 법률’에서 제도, ‘성흔’에선 신이자 괴물인 존재를 등장시킨 것이다.

가즈미에 관한 정보를 절대적으로 믿으며 가즈미를 숭배하는 ‘검은 메시아와 검은 어린 양’이란 사이트를 통해 가짜뉴스, 정치의 맹신 같은 문제도 환기한다. 이들은 가즈미가 자살한 뒤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세상에 돌아왔다고 믿는다. “저는 죽어서 다시 태어날 거예요.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되어 세상에 되돌아올 거라고요. 엄마나 가시와자키(동거남)처럼 나쁜 인간을 퇴치하려고요. 저처럼 비참한 처지의 아이들이나 여자들을 구하고 싶어요” 같은 가즈미가 하지도 않은, 인터넷에 도시전설처럼 떠도는 말이 근거다. 황당하고 뻔한 이야기에 공감하고 공명하는 사람들의 ‘공상’이 ‘교의’로 신봉하는 지경으로 이어진다. 가즈미의 자살도, 부활도 이들에겐 사실이다. “그 ‘사실’ 위에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새기고 있다.” 가즈미는 이 사이트와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된 뒤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 사람들 말이야, 그저 주저앉아 언젠가 구원받으리라 생각만 하는 거면 나도 별수 없어.”

“아버지, 생각해봐. 훨씬 나쁜 가능성도 있거든. 이런 글을 올리는 누군가는 자신이 피해자다, 주위 사람은 적이다, 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악마의 부하니까 해치워도 된다고 일방적으로 단정해버린 경우도 있을지 몰라.”

“오직 자신들만 진실을 알고, 자신들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왠지 몰라도 결국 그런 방향으로 가버리거든.” 이성과 공감 능력을 지닌 가즈미는 어떻게 ‘검은 메시아’를 보게 됐을까.

이 소설집이 어둡고 무거운 것만은 아니다. ‘나와 나’는 40대 주인공인 ‘나’가 30년 전 고등학생인 ‘나’와 조우하는 ‘타임슬립’을 소재로 쓴 작품이다. 현재의 나가 과거나 미래의 나와 만나는 소재의 SF는 드물지 않다. 소품 같은 작품의 아래 같은 대사를 읽다 자신을 대입하면 피식 웃게 된다. “ ‘마흔다섯 살에, 나 아줌마처럼 된다고?’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다. 뭐랄까 심히 당혹스럽다. ‘빨리 돌아가는 편이 좋겠어.’ 내가 말했다. ‘네 시간대로 돌아가서, 악몽 꿨다고 생각하고 그냥 잊어’.”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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