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9개월 만에 체포된 이관술이 일제에 털어놓은 것은

한겨레21 2023. 1. 13.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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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의 역사극장]1941년 1월 일본 경찰에 체포된 ‘공산당 재건 거두’
허위 진술로 일제 속이고 끌까지 동료 지킨 ‘빛나는 영웅’
옥중에서 찍은 31살 이관술 모습. 1933년 4월11일 반제동맹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을 때 일본 경찰이 찍었다. 임경석 제공

“그해 연말에 다시 상경하니 예의 서대문서 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사건의 수습을 위하여 원동(苑洞) 김태준(金台俊) 동무와 처음 만났고, 그 뒤에 다시 함북으로 떠나는 데 관한 몇 가지 부탁을 하러 김태준 동무의 집에를 다시 갔다가, 숨어 있던 형사대에게 잡히고 말았다.”1

이관술은 체포되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941년 1월7일이었다. 세간에서 ‘서대문서 사건’이라고 부르는, 비밀결사 경성콤무니스트그룹(경성콤그룹) 검거 사건에 말려들었다. 체포된 곳은 창덕궁 서편 금호문 밖 원동 158번지 김태준 집이었다.

김태준이 누군가? 그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한 수재로 <조선한문학사>(1931), <조선소설사>(1933)를 저술한 35살의 소장 국문학자였다. 1939년부터는 경성제대에서 ‘조선문학’ 강좌를 맡은, 강사 신분의 대학 교원이기도 했다. 경성제대 강사로 취임했을 때는 신문에 얼굴 사진과 함께 큰 기사가 실렸다.2

그럴 만큼 김태준은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한 젊은 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또 하나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일본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비밀결사의 동지였다. 경성콤그룹 구성원이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반일 민족주의자와의 연대를 모색하는 인민전선부 간부직을 맡고 있었다.

발각된 김태준을 감지하지 못하고

왜 김태준을 만나려고 했는가? 이관술의 진술에 따르면, 검거 사건의 수습을 위해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들이 수습을 위해 어떤 조처를 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짐작할 수는 있다. 보기를 들면 조선계기회사 내에서 노동조합 조직을 꾀하던 조직원 이주상에게, 즉각 퇴직하고 모든 조직 행동을 일체 중단한 채 피신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건 수습책이었을 것이다.

이관술은 김태준의 집을 다시 찾아갔다고 한다. 함경북도 지방으로 떠나기에 앞서 몇 가지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몇 가지란 무얼까. 아마도 함경도와 경성 사이 연락 체계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혹은 장거리 이동에 필요한 노자를 얻으려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다. 김태준은 이미 발각된 상태였다. 원동 집은 위험한 곳으로 변모했다. 이관술은 그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잠복해 있던 서대문경찰서 형사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일본 경찰은 이관술을 ‘공산당 재건운동 사건의 거두’라고 지목했다. 전국에 수배령을 내린 상태에서 장기간 그를 추적했다. 1934년 4월 반제동맹사건 피고인으로서 병보석을 얻어 일시 출옥했다가 탈출한 자였다. 1936년 12월 이재유 검거 사건(창동 사건) 때 그를 아슬아슬하게 놓쳤고, 1937년 7월 여름 장마 중 여의도에서 한때 체포했으나 감시 소홀로 탈출을 허용하고 말았다(여의도 사건). 그러다 마침내 1941년 1월 그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수배령을 내린 지 6년9개월 만의 일이었다.

범인의 체포와 취조, 검찰국 송치까지 모든 수사 과정을 맡은 관서는 경성 서대문경찰서였다. 사상 사건인 만큼 고등계를 담당하는 요시오카 사다지로 경부가 진두에서 지휘했다. 요시오카는 말단 순사직에서 시작해 경부직까지 승진한, 전형적인 일본인 경찰관이었다. 조선총독부 직원록 자료에 따르면, 그는 강화경찰서 순사로 재임하던 1931년 5월 순사부장 시험에 합격했다.3 1934년 본정경찰서 순사 재임 중 시인 이육사를 취조한 것도 바로 이자였다. 1936년 경부보 시험에 합격해, 개성경찰서·수원경찰서·종로경찰서에서 근무했다. 1941년 경부로 승진함과 동시에 서대문경찰서에 배속됐다. 근무 의욕이 충만했다. 그는 경성콤그룹 제1차 사건을 탄압한 현장 지휘관이었다.

서대문경찰서 요시오카 사다지로 경부가 1941년 7월20일 작성한 ‘피의자 이관술 신문조서 제27회’ 첫 쪽. 임경석 제공

경찰 간부의 이례적인 직접 취조

요시오카 경부는 이관술을 직접 취조했다. 경찰 간부로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관례적으로 하위직인 순사나 경부보가 할 일을 자담한 것이다. 이관술 취조를 그만큼 중시한 까닭이었다.

이관술은 ‘서대문서 사건’의 주역이었다. 서대문경찰서장 명의로 작성된 ‘검찰 송치서’에 따르면, 이관술은 관련 범죄자 42명 가운데 첫자리에 놓인 수괴였다. 범죄의 비중에 따라 나열된 피의자 명단의 첫자리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1. 이관술 2. 김삼룡 3. 이현상 등의 순서로 작성됐다.

경찰 취조도 이관술에게 집중됐다. 취조 결과를 담은 ‘피의자 이관술 신문조서’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작성된 것만도 도합 27회에 이른다. 다른 피의자들보다 두세 배 더 많았다. 이 신문조서는 체포된 뒤 이관술이 1941년 1월7일부터 7월20일까지 6개월 남짓 기간에 경찰에게 어떻게 취조받았는지 보여주는 더할 나위 없는 자료가 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체포 직후 작성된 초기 신문조서가 남아 있지 않다. 신문조서 제1~11회분, 제20~22회분이 보존되지 않았다. 특히 제1~3회분이 없는 점이 아깝다. 7년이나 추적한 거물 수배자를 체포한 경찰에도 이관술 취조는 여간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입을 열어야 지하운동의 비밀을 파악할 터였다. 고문을 해서라도 비밀을 캐내야 했다. 따라서 취조 현장은 경찰의 추궁과 체포된 혁명가의 진술 전략이 치열하게 맞부딪치는 현장이었다.

그 취조 현장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조서 분량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제4~27회의 조서 분량은 70~120쪽에 걸쳐 있다. 평균 100쪽 안팎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1회는 186쪽, 제2회는 164쪽, 제3회분은 194쪽에 이른다. 초기 3회에 걸쳐 가장 강도 높은 취조가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어쨌거나 현존하는 이관술 신문조서는 13회분이다. 서대문서에서 작성한 27회분의 절반쯤에 해당한다. 하지만 취조의 전모는 아닐지라도 이관술이 겪은 고초의 내용을 살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경성부지형명세도’(1929년판)에 표시한, 경성부 원동 158번지 김태준의 집. 1941년 1월7일 이관술이 체포된 곳. 임경석 제공

두 가지 진술 전략을 세우다

“잡힌 뒤 경찰의 추구 중심은 박헌영 동무를 내어놓으라는 것이었으나, 박동무는 다행히 무사하였다.”4

이관술은 해방 이후 이렇게 회고했다.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체포됐을 때 고등계 형사들이 자신을 어떻게 다뤘는지 설명하는 대목이다. 6개월 동안 27회에 걸쳐 온갖 문제를 추궁당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집요한 질문은 상급자의 소재에 관한 것이었다. 배후에 누가 있느냐, 그의 이름과 소재를 털어놓으라! ‘피의자 신문조서’는 이 곤란한 추궁에 이관술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관술은 내심 두 가지 진술 전략을 세웠던 것 같다. 첫째, 경찰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안은 철저히 은폐한다는 전략이다. 아직 체포되지 않은 동지의 소재에 관한 문제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조직 내 비밀에는 그렇게 대응했다. 둘째, 경찰이 증거를 확보한 사안이나, 동지에게 위해가 가지 않는 사안은 되도록 자세히 진술한다는 전략이었다.

상급자의 신원과 소재를 밝히라는 추궁은 첫 번째 사안에 해당했다. 어떻게 은폐할 수 있었을까. 버티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 같다. 뒷날 이관술이 만신창이가 되어 병보석으로 출감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이동생 이순금은 당시 정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오빠는 “일제의 야만적 살인적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동지 한 사람도 대지 않았”다. 그의 투쟁사를 빛나게 하는 영웅적 행위였다. 하지만 대가가 있었다. “감옥투쟁에서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놈들도 송장 치르기 싫어 결국 보석”을 허용했다. 감옥 밖으로 나온 이관술의 모습은 처참했다. “그의 건강은 참으로 위독하였다. 누가 보든지 절망적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5

네이버 지도에 표시한,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58-1번지 옛 김태준의 집. 1941년 1월7일 이관술이 체포된 곳.

존재하지 않는 제3자가 있는 양

단지 버티기만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개연성 있는 허위 진술을 병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에 실재하는 박헌영을 은폐하기 위해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 제3자를 마치 있는 양 허위로 진술하는 방안을 택했다. 바로 김단야였다. 이관술은 김단야를 마치 대리인을 매개로 하여 지속적으로 접촉했던 것처럼 진술했다. 경찰이 진실로 바라는 정보였다. 이관술 입장에서도 그렇게 진술하는 것이 유리했다. 왜냐하면 김단야는 만난 적도 없고, 조선 내에 있지 않기에 절대 체포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단야 언급은 신문조서 도처에 반복해서 나온다. 예를 들어 제12회 신문조서를 보자. “김단야와 그 후 언제 어디서 만났는가?”라는 경찰의 추궁에 대해, “(1939년) 10월11일~12일경 낮에 효창공원 연못에서 25~26세의 동지를 통하여 만났습니다”라고 진술했다. 김단야는 기관지 <공산주의자> 1939년 9·10월호가 매우 훌륭하게 나왔다고 칭찬했고, 다음호 원고를 넘겨줬다고 한다.6

일본 경찰은 이 허위 진술을 날름 수용했다. 그리하여 사건 최종 보고서에 김단야가 마치 이관술의 상급자인 양 묘사했다. 김단야가 경성콤그룹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처럼 그렸다. 경찰만이 아니었다. 경성콤그룹에 관한 초창기 연구 성과도 이 허위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그에 따르면, “일제의 수배를 받아오던 이관술은… 1939년 3월 말경 이순금의 소개로 김단야(1938년 12월 입국)를 만나 소련의 정세에 대해 교양을 받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협의하였다”고 적었다. 또 있다. “박헌영은 1940년 2월25일경 김삼룡으로부터 김단야를 소개받고” 운운했다. 마치 김단야가 1938년 12월 조선에 입국해 경성콤그룹과 관계를 맺었고, 박헌영이 김삼룡에게 소개받아 김단야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인 양 서술했다.7

이런 인식은 일본 고등경찰이 품은 그림일 뿐이지 실제 사실은 아니었다. 달리 말하면 이관술의 진술 투쟁이 승리를 거뒀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8

1941년 1월7일 이관술이 체포된 곳의 현재 모습. 임경석 제공

기관지 발간 경위는 매우 자세하게

두 번째 진술 전략도 ‘피의자 이관술 신문조서’ 도처에서 발견된다. 기관지 <공산주의자> 발간 경위에 대한 진술이 그 보기이다. 기관지 제작 경위와 필경 기술, 표지 그림의 의미, 정가표시제의 의미, 원고 모집 경위, 각 호 기사의 주요 내용 등을 이관술은 막힘없이 술술 진술했다. 매우 자세했다. 이미 증거가 경찰에 넘어갔고 동지들에게 위해가 가지 않을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기관지 9·10월호 표지 그림의 의미에 대한 진술이 그 보기가 된다. 이관술은 말했다. 아래쪽에 그려진 산과 같이 보이는 것은 조선 지도 서쪽 절반을 가로로 눕혀놓은 것이고,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경성을 의미한다. 그 중앙에 쇠사슬로 묶은 곳을 끊어 마디를 만들고, 소비에트 마크를 넣었다. 그는 결론 삼아 말하기를, “전체 의미는 경성에 자리잡은 조선 ‘공산주의자’의 빛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조선을 결박하고 있는 현 사회제도의 사슬을 끊겠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참고 문헌

1.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 <현대일보> 1946년 4월19일

2. ‘城大 강사에 취임, 高橋씨와 함께 조선문학 강좌 담당’ , <동아일보> 1939년 2월9일

3. ‘조선총독부관보’ 1026호, 1930년 6월6일

4. 이관술, 앞의 글

5. 이순금, ‘오빠 이관술 동지 검거의 소식을 듣고서’ , <현대일보> 1946년 7월15일

6. 경성서대문경찰서경부 吉岡定次郞, ‘피의자 이관술 신문조서 제12회’, 3462쪽, 1941년 6월3일. ‘이관술 외 15명 형사제1심소송기록’ 11, 1942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문서번호 139

7. 신주백, ‘박헌영과 경성콩그룹’ , <역사비평> 13, 272쪽, 274쪽, 1991년

8. 경성서대문경찰서경부 吉岡定次郞, 앞의 글, 3461~34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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