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의 정치사기] 조선 숙종 시기 한강 익사사건과 오늘날의 이태원 참사
"강변에 있던 별장(別將, 지방의 산성·나루 등의 수비를 맡은 종9품 무관)과 사격(沙格, 배를 운행할 때 노를 젓는 사공과 그를 돕는 격군)의 무리가 끝내 구제할 뜻이 없었으니 통탄할 일입니다. 죄인을 형장으로 치면서 심문하고, 자백을 받아낸 뒤에는 유배형에 처하소서."
1718년 숙종 44년 11월 4일. 수찬(修撰, 홍문관에 소속된 정6품 관원) 김상옥이 상소에 올려 건의한 내용이다. 1주일 전(10월 28일) 한강에서 익사사고가 난 것을 두고 관리의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한다는 게 골자다. 배가 뒤집히고 물에 빠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인근에 있던 관리들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들이 배에 무분별하게 몰려든 상황을 방치한 사실도 드러났다. 결국 배가 수용할 수 있는 인원보다 더 많은 사람이 탔고, 모두가 죽었다. 100여명이 죽는 대참사였다. 당시 인구를 지금의 3분의 1로 잡고 단순화하면 오늘로 치면 300여 명쯤 사망한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 참사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김상옥은 "먼 지방의 많은 선비가 과거에 응시했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적에 물에 빠져 죽었고, 숙질과 형제가 배를 탔다가 함께 빠져 죽은 자도 있을 것"이라며 "원통하게 맺힌 기운이 하늘의 화기를 범하기에 충분하니 담당부서가 별도로 제사를 지내 영혼을 위로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숙종은 즉시 답서를 내렸다. 그는 "1백 명이 일시에 물에 빠져 죽었으니, 참으로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며 "사격 무리의 잘못을 엄중하게 묻는 일은 모두 상소한 내용대로 시행하라"고 했다. 이후 강가에 단(壇)을 설치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오늘날의 정부와 정치권은 500여년 전 한강 사건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지난해 발생한 '이태원 핼러윈 참사'에 대한 이들의 대응방식을 보면 그렇다. 이태원 참사는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해밀톤호텔 서편의 작은 골목에 핼러윈 축제를 즐기려는 수많은 인파가 몰리게 되면서 발생한 대규모 압사 사고이다. 156명이 사망했고, 157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현장을 관할해야 하는 자치단체와 경찰의 대응은 조선시대와 비교해 나아지지 않았다. 조선 숙종시대 강에서 참사가 일어나는 데도 손을 놓고 있던 별장, 사격과 판박이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12일 국회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진행한 2차 공청회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날 국회에서 열린 공청회에는 유가족 8명, 생존자 2명, 지역 상인 1명이 진술인으로 참석했다. 이들은 참사 당시 구조 당국 대응과 정부의 태도가 미흡했다며 질타했다. 분노에 찬 통곡을 터뜨리기도 했다.
조미은 진술인은 "현장에 두 번이나 갔던 용산구청장 박희영은 옆집 아줌마인양 기자들을 막기만 했고, 현장 상황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며 "또 용산서 상황실장 송병주는 쏟아지는 인파를 인도로 몰으라고 지시했다. 인파를 도로로 분산시켰다면 몇 명이라도 살았을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상황실에 있던 류미진과 정대경, 설렁탕 먹고 뒷짐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느릿느릿 걸어간 이임재 용산서장. 이들은 예측, 대비, 대응, 수습 어느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정부의 대응은 조선시대보다 못하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유가족과 희생자의 심정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모양새다. "원통하게 맺힌 기운이 하늘의 화기를 범하기에 충분하니"라며 참사 희생자들의 심정을 헤아리려는 조선시대 위정자와는 딴판이다. 특히 이 장관은 유가족과 생존자의 요청에도 끝내 공청회에 나오지 않았다. 생존자로서 참석한 김초롱 진술인은 "제게 2차 가해는 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원들의 말이었다"며 "'예전에 비해 우려할 정도 인파는 아니었고, 경찰 병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이상민) 장관 첫 브리핑을 보고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김 진술인은 또 "몇 주 전 고등학생 생존자가 스스로 세상에 작별을 고했을 때는 국무총리 발언이 생각났다. 스스로 더 굳건하고 치료를 받겠다는 생각이 강했으면 좋지 않았을까라고 했다.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다. 치료와 상담을 받더라도 매번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경험을 한다. 참사와 같은 재난을 겪은 사람에게 개인적 극복도 중요하지만 진상규명만큼 큰 치유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종철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대표는 "국회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지난 국정감사 때 국회의원님들이 행정부를 잘 감시해서 이 모래성 같은 행정부와 경찰청 조직에 대한 상황을 인지하고 꾸짖고 일 못하는 분들을 처벌해 주셨으면 이런 참사는 없었다"고 비판했다. 여야 의원들을 향해선 "국민들을 위해 이런 대형 참사가 발생했을 때는 여야 의원님들이 유가족 보는 방향을 똑같이 바라봐 달라"며 "우리가 어떤 것을 원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지"라고 촉구했다.
왜 같은 참사를 겪으면서 사고를 예방하는 지혜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인가.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듯하다. 더 이상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지 말아달라.김세희기자 saehee01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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