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정인교에게 농구는 ‘사랑’이다

손동환 2023. 1. 13.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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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2년 12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는 2022년 11월 10일 오후에 진행됐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KBL 초창기만 해도, ‘기부’는 농구인과 팬들에게 생소한 단어였다. 하지만 한 명의 농구인이 ‘기부’를 KBL의 문화로 퍼뜨리기 시작했다. ‘사랑의 3점 슈터’로 불린 정인교(전 숭의여고 코치)다.
‘기부’는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이다. 농구인과 팬들이 교감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정인교의 기부는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인교의 인생에도 마찬가지였다. ‘농구’와 ‘사랑’을 동일한 단어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3점 슈터
KBL 초창기를 수놓았던 많은 스타들이 있었다. 원주 나래 소속이었던 정인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제이슨 윌리포드-칼 레이 해리스와 나래의 주득점원을 맡았고, 나래를 KBL 원년 시즌 챔피언 결정전으로 이끌었다.
또, 정인교는 KBL 초창기를 대표하는 슈터였다. 그러나 그가 많은 주목을 받은 이유는 따로 있다. 3점슛 1개를 성공할 때마다 10,000원 씩 유니세프에 기부했고, 이로 인해 ‘사랑의 3점 슈터’라는 별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정인교하면 생각나는 게 ‘사랑의 3점 슈터’입니다.
프로농구가 태동할 때는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있던 나래는 산업은행 시절부터 큰 응원을 받지 못했어요.(농구대잔치 시절 한국산업은행 선수들이 나래 블루버드로 넘어갔다) 또, 연고지가 스포츠 불모지였던 원주였고요.
하지만 저희 나래가 주위 평가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냈어요. 팬들의 사랑도 많이 받았어요. 팬들의 응원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에 이바지할 방법을 생각했죠.
여러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 때 한 지인께서 NBA 선수들의 ‘Donation(기부)’ 사례를 들려줬어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내 스포츠에서는 기부하는 선수가 거의 없었던 시기였고, 프로 선수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방법도 고민했습니다. 주위에서 “3점슛을 넣을 때마다 기부하면 어떻겠냐?”고 제언했어요. 동의했습니다. 다른 건 잘 못해도, 3점슛에는 특화됐거든요. 다행히 기부하기 시작했던 시즌의 성적도 좋았습니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선수 정인교’의 전성기는 원주 나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를 한 번 돌아봐주세요.
개인 기록은 산업은행 시절에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1994~1995 농구대잔치부터 두 시즌 연속 득점 1위와 3점슛 1위를 했으니까요. 하지만 팀이 약해서, 제 기록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팀 또한 많은 응원을 받지 못했어요. 오빠부대를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들었죠.
그렇지만 프로로 넘어오면서, 성적과 여러 요소들이 좋게 맞물렸습니다. 특히, 좋은 외국 선수 2명(제이슨 윌리포드-칼 레이 해리스) 덕분에, 저에게 몰렸던 수비가 분산됐죠. 그래서 재미있고 편하게 농구했습니다.
2004년 은퇴를 결정하셨습니다.
처음 트레이드될 때도 혼란스러웠습니다.(나래 소속이었던 정인교는 1997~1998시즌 종료 후 제이슨 윌리포드와 함께 부산 기아로 트레이드됐다) 그 때만 해도 프로 초창기라, 트레이드 개념이 크게 없었거든요. 팀 컬러에 적응하는데 애를 먹어서 내리막 아닌 내리막을 걸었고, 상실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로 생활을 몇 년 하면서, ‘프로가 이런 곳이구나’라는 걸 느꼈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 했는데...’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또, 팀에서 중심 역할을 잘 해냈다면, 마지막도 아름다웠을 건데... 그렇지 못해서 아쉬웠어요.

HEAD COACH
정인교는 2003~2004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2005~2006시즌부터 광주 신세계 쿨캣(현 부천 하나원큐)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해당 시즌 중에는 감독대행도 맡았다.
2007년부터 신세계의 정식 사령탑이 됐다. 그리고 6년 가까이 신세계 선수들을 지도했다. 임영희(현 아산 우리은행 코치)와 김정은(현 아산 우리은행) 등 WKBL 정상급 선수들과 함께 했다.
하지만 시련이 찾아왔다. 신세계가 해체된 것. KEB하나은행(현 하나원큐)이 신세계 선수단을 인수했지만, 정인교는 실업자가 됐다. 그러나 SBS SPORTS 해설위원으로 농구를 더 넓게 바라봤다.
그리고 인천 신한은행이 정인교의 손을 잡아줬다. 정인교는 2014~2015시즌부터 신한은행의 감독이 됐다. 그렇지만 신한은행과 오래 동행하지 못했다. 2015~2016시즌 중반에 성적 부진으로 자진 사퇴했기 때문이다.

2005년부터 광주 신세계 쿨캣(현 부천 하나원큐)의 코치로 지도자를 시작했습니다.
은퇴하고 나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김윤호 감독님께서 코치를 권유하셨습니다. 그래서 코치를 시작했죠.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신세계의 감독을 맡으셨습니다.
제가 코치로 들어간 지 6개월 정도 만에, 김윤호 감독님께서 자진 사퇴하셨습니다. 제가 감독대행을 1년 반 정도 했죠. 그리고 2007년부터 정식 감독을 맡았습니다.
저도 젊을 때였고, 팀 또한 젊은 선수들 위주로 구성됐습니다. 제가 비록 역량을 발휘한 건 아니지만, 지도 철학을 확립하고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배웠습니다.
신세계의 지원이 열악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운동 환경도 그랬고, 선수 수급도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트레이드나 FA(자유계약) 시장이 활발하지 않았거든요.
그걸 극복할 수 있는 건 연습이었습니다. 다만, 무조건적인 연습은 아니었습니다. 디테일하게 준비하고, 디테일한 연습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힘들기도 했지만, 보람도 많이 느낀 시기였어요.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어려움이 크셨을 것 같습니다.
신세계가 초창기에는 좋은 선수들과 함께 3년 연속 우승했습니다. 하지만 그 선수들이 FA 자격을 얻은 후 팀을 떠났습니다. 지원도 열악했고, 선수 구성도 좋지 않았어요.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무엇보다 여자 선수들을 처음 지도하는 거였습니다. 먼저 남자 선수들보다 더 디테일하게 가르쳐야 해요. 그리고 여자 선수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에 바로 들어옵니다. 농구 이해도가 아무래도 부족해요. 그런 것들을 다잡아줘야 해요.
또, 여자 선수들만이 지닌 특유의 문화가 있습니다. 신체 조건과 심리 상태 모두 남자 선수들과는 달라요. 그렇지만 저는 그런 것들을 모르고 시작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어려움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여러 요소들로 인해, 개인적인 시행착오가 컸습니다. 어렵고 아쉬운 것도 있지만, 저의 부족함을 가장 크게 느꼈습니다.
2012~2013시즌부터 SBS SPORTS의 해설위원을 맡으셨습니다.
KBL과 WKBL 모두 해설했습니다. 각 팀의 색깔을 파악할 수 있었고, 많은 지도자 분들의 지도 방식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코트 안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선수 기용 방식(선수들을 언제 투입하고, 선수들에게 언제 휴식을 줘야 하는지 등)과 타임 요청 시기도 파악했고요. 신한은행 감독을 맡았을 떄와 숭의여고 코치를 맡았을 때, 그런 것들을 접목시키기도 했습니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인천 신한은행의 감독을 역임했습니다. 신세계 시절과는 어떤 게 달랐나요?
선수 지원과 선수 구성이 신세계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하지만 제가 간과한 게 있어요. 좋은 재료들을 버무리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또, 고참과 어린 선수들을 적절하게 배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이 많이 미숙했어요. 아쉬움이 컸죠.

프로 팀 감독, 학생 선수와 만나다
신한은행 감독에서 물러난 후, 3년의 공백기를 맞았다. 하지만 코트를 떠나지 않았다. 농구공을 잡은 일반 학생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프로 선수 혹은 엘리트 선수가 아니었기에, 정인교가 느낀 건 더 많았다.
그리고 2019년 11월 4일, 숭의여고 코치로 부임했다. 숭의여고는 여고부에서 정상급 경쟁력을 지닌 학교. 그러나 학생 선수는 학생 선수였다. 프로 선수처럼 완성되지 않은 원석들이다. 정인교 코치 또한 그런 점을 생각했다. 그래서 기초를 다지는데 집중했다. ‘육성’이라는 단어를 가장 신경 썼다.

2016년부터 3년 동안 공백기가 있으셨습니다.
재능 기부를 했습니다. 집 근처에 있는 유소년 선수들을 가르쳤어요. 또, 중고등학교 엘리트 선수들도 지도했습니다. 주위에서 요청을 받았거든요.
일반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처음이셨습니다.
일본은 ‘1인 1기’(한 명의 학생이 한 개의 운동 종목을 선택해야 한다)를 하고 있습니다. 스포츠 인프라가 굉장히 좋아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점들을 내심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반 학생들에게 다가가는 시간이 좋았고요.
농구를 배우는 친구들이 농구를 더 즐겼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더 노력했습니다. 일반 학생들이 농구에 흥미를 지닌다면, 프로농구 인기도 올라가지 않을까라고 생각했거든요.
또, 학원 스포츠의 환경이 어렵다는 걸 느꼈습니다. 보통 코치 1명이 10명 내외의 선수를 가르치는 게 현실이에요. 학생 선수들을 가르치는 인력이 부족한 거죠. 이렇게 되면, 어린 선수들이 기본기를 제대로 배울 수 없어요. 더 좋은 환경이 구축할 수 있도록, 선배들이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019년부터 숭의여고 코치로 부임했습니다. 지도 방식이 예전과는 다르셨을 것 같아요.
프로 선수들을 지도하는 방식과 학생 선수들을 지도하는 방식은 물론 다릅니다. 하지만 공통점은 있습니다. 기본기를 철저하게 숙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또, 여자 고등학교 선수들은 졸업 후 바로 프로를 노리기 때문에, 프로에서 하는 훈련을 알아야 합니다. 지도자들도 그런 방향으로 훈련시켜야 하고요. 학생 선수들의 이해도가 프로 선수들보다 떨어진다고 해도, 학생 선수들은 그런 훈련을 미리 해야 합니다.
학생 선수들을 지도하는 일입니다. 많은 걸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여자고교농구의 인프라는 더 열악합니다. 선수 수급이 더 어려워요. 그래도 명맥은 끊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학원 스포츠다 보니, 선수들 모두 수업을 받고 훈련해야 합니다. 훈련 시간이 부족했어요.
성적도 중요하지만, 졸업 후 진로가 결정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여자 고교 선수들은 졸업 후 프로에 도전하거든요. 거기서 오는 어려움도 컸습니다. 하지만 저는 2명의 제자를 프로 팀에 보냈고, 저희 학교는 적은 인원에도 우승아나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나쁘지 않은 성과를 냈다고 생각합니다.

“농구는 사랑입니다”
대부분의 농구인들이 인생의 대부분을 농구공과 함께 했다. 그들의 직장은 코트였고, 코트에서의 퍼포먼스로 인사 평가(?)를 받았다.
가장 큰 의미는 코트에서 흘린 땀이다. 농구인들 모두 흘린 땀방울 속에서 추억을 쌓았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농구인들이 ‘농구’를 각별한 의미로 여긴다. 정인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주말마다 프로에 진출한 여자 선수들을 가르쳤습니다. 스킬 트레이닝 개념이었죠. 2022~2023시즌 개막 전까지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부터 KBL의 복지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비록 코로나19 때문에 활동을 많이 하지 못했지만, 이번 시즌에는 코트에 자주 나가보려고 합니다.
‘농구’는 어떤 의미인가요?
닭살 돋긴 하지만, 사랑입니다.(웃음) 제가 비록 프로 생활을 길게 하지 못했지만,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거든요. 팬들에게 받은 사랑 또한 어느 정도 돌려드렸다고 자부해요. 그래서 ‘농구’를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제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농구’의 힘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정인교의 농구 인생’을 한 번 돌아봐주세요.
지금의 시선으로 저를 바라본다면, ‘선수도 지도자도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큽니다. 더 책임감을 가져야 했고, 더 절실해야 했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을 사는 모든 분들께서 그런 아쉬움을 가질 거라고 생각해요.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실 건가요?
당연하죠.(웃음) ‘정인교’라는 사람을 어필할 수 있었던 건 농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저를 어필할 수 있는 자리에 서고 싶어요. 지금과 같은 생각-시야-마음가짐이라면, 농구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
사진 제공 = KBL(본문 첫 번째 사진), WKBL(본문 2~4번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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