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의 징조" 초비상…새해 첫날부터 진땀 뺀 이마트 [박종관의 유통관통]
유통시장은 작년 한 해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 호재가 인플레이션, 자산시장 냉각 등의 악재를 누른 형국이었다. ‘소비가 곧 꺾일 것’이란 우려가 이어지면서도 백화점 세일행사는 매번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 외식·명품산업 등도 초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해가 바뀌자마자 유통현장 곳곳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글로벌 금리 인상 후폭풍이 본격적으로 소비 시장에 영향을 미치면서다.
13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한 대형마트의 버섯 매출은 전년 동월 대비 7% 줄어들었다. 다시마 매출은 5%, 파프리카는 6% 감소했다. 이에 관해 신선식품 바이어는 “버섯과 다시마 등은 흔히 ‘구색 식자재’로 불린다”며 “요리할 때 반드시 넣어야 하는 재료는 아니다 보니, 경기가 어려워지면 소비자들이 가장 먼저 구매 리스트에서 제외하는 품목”이라고 설명했다.
‘불황형 소비’ 패턴은 설 선물세트 판매 데이터에서도 나타난다. 임직원용 선물세트를 대량으로 구매하는 기업들은 구성 품목이 비슷하면서도 값은 싼 세트를 사는 식으로 씀씀이를 줄여나가고 있다.
증권가에서도 유통업과 소비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잇따른다. 서현정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올해 유통업황은 다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하다”며 “경기 위축과 물가 상승, 이자 부담 증가 등으로 소비심리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하나증권에 따르면 올해 스타벅스 등 계열사를 제외한 이마트 자체의 영업이익률은 1.2%에 그칠 전망이다. 코로나19 창궐 첫해인 2020년(2.1%)의 절반 수준이다.
다만 중국 등 외국인 관광객의 영향을 많이 받는 면세·관광·뷰티업종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하늘길이 본격적으로 열리면 지난 3년여간의 부진을 털고,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수요가 회복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중국이 아직 코로나19 대유행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점, 중국인 여행객의 입국 규제가 강화된 점은 변수다.
소비심리, 연초부터 급랭 조짐
이마트는 새해 첫날부터 진땀을 뺐다. 주요 먹거리와 생활필수품을 대대적으로 할인 판매한 ‘DAY1’ 행사에 예상을 뛰어넘는 인파가 몰렸기 때문이다. 일부 점포는 출입 인원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을 정도였다.
소비자들은 휴지, 샴푸, 칫솔 등 반값에 파는 생필품을 장바구니에 가득 채워 떠났다. 행사 관계자는 “20년 넘게 할인행사를 기획했지만, 새해 첫날부터 이 정도 인파가 몰린 건 처음”이라며 “100원이라도 싸게 사 쟁여놓자는 심리가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다.
유통현장에선 해가 바뀌자마자 소비 패턴에 변화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작년 한 해를 지배했던 ‘보복 소비’, ‘플렉스(과시소비)’ 등은 이미 잊힌 단어가 됐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소비자들이 비슷한 제품이라면 10원이라도 싼 제품을 집어 들고 있다.
소비자가 제품의 ‘질’보다 ‘가격’에 초점을 맞추자 필수소비재 업계 판도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가공식품이 대표적이다. 전통적으로 참치캔, 라면 등 일상과 밀접한 가공식품은 판매 순위와 시장 점유율에 변화가 거의 없다. 부동의 1위 상품을 습관처럼 구매하는 소비자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이런 추세가 바뀌고 있다. 1982년 첫 출시 후 40여년 간 국내 시장에서 선두 자리를 한 번도 내준 적 없는 1위 동원참치와 2위 사조참치의 점유율 격차가 한 대형마트에서 크게 좁혀진 것도 소비 패턴 변화가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동원참치는 사조참치보다 정상가 기준 동일 중량 제품이 평균 0.5% 더 비싸다. 사조참치가 할인행사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향을 보이는 점을 고려하면 소비자가 체감하는 가격 차이는 더 크다. 한 대형마트 가공식품 담당 임원은 “가공식품 시장에선 2등 제품의 점유율 1%가 오르고 내리는 것도 엄청난 변화”라며 “아직 격차가 크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한 사조참치가 치고 올라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냉동식품과 델리(즉석조리) 매출이 급격한 증가세를 보이는 것도 불황형 소비의 단면이다. 외식 물가가 오르자 대형마트 델리코너는 인근 직장인들로 점심시간마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고 있다.
글로벌 금리 인상 후폭풍 덮치나
전문가들은 글로벌 금리 인상의 후폭풍이 본격적으로 소비 시장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지난해 6월부터 4연속 자이언트스텝(한 번에 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을 밟기 시작했을 때부터 업계에선 반년 정도 시차를 두고 소비에 타격을 줄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소매유통업체 50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지난해 4분기 ‘소매유통업 경기전망지수’는 전 분기 대비 11포인트 하락한 73에 그쳤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2009년 1분기와 같은 수치다. 지수가 낮을수록 다음 분기의 경기를 직전 분기보다 부정적으로 보는 기업이 많다는 의미다.
유통업체 입장에서 할인행사 때만 손님들이 몰려들고, 행사가 없을 때는 매장이 텅텅 비는 지금과 같은 흐름이 달갑지 않다. 할인 품목만 노리는 ‘체리피커’가 늘어날수록 실적은 악화하기 때문이다.
강성현 롯데마트 대표가 최근 신년사에서 “앞으로는 할인행사만 보고 오는 ‘바겐헌터족’보다 충성 소비자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마트는 최근 창고형 할인점인 트레이더스에 유료 멤버십을 도입해 소비자들을 붙잡아 두는 전략을 쓰고 있다.
오너들도 “위기, 위기, 위기”
명품 열풍으로 코로나19 기간 역대 최대 매출을 매번 경신해왔던 백화점도 ‘초긴장 모드’다. “리셀(되팔기) 업자들을 빼면 명품 실수요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지난해부터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해외여행 문이 올해 더 활짝 열릴 것이란 전망에 힘이 실리는 것도 백화점엔 악재다. 한 백화점 명품 바이어는 “그간 명품 수요자들은 1년에 수백만원 쓰던 해외여행비를 명품 구입에 돌려왔다”며 “이런 수요가 줄어들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유통업계 오너들도 연초부터 극도의 위기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신동빈 롯데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나란히 ‘위기’를 키워드로 꼽았다. 정 부회장은 “고물가·고환율·고금리 ‘3고 시대’에 소비자와의 접점이 큰 리테일 비즈니스는 더 큰 위기를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박종관 기자 p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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