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폐자재로 만든 가방” 패션위크 뒤흔든 MZ세대 역발상
업사이클링 패션 원자재로 화려한 변신
뉴욕·파리·서울 패션위크 런웨이 호평
기업에 중요한 건 아이템보다 기업가정신
지난해 10월 프랑스 파리의 글로벌 명품 패션쇼 단골 장소로 알려진 브롱니아르궁. 이 곳에서 열린 2023 SS 파리패션위크에서 뜻밖의 한 국내 대기업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고급 패션 브랜드의 자리를 대신한 이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수그룹’. 이수그룹은 화학과 건설 등 중후장대 산업을 주력하는 하는 회사다. ‘디자인’, ‘가방’, ‘패션쇼’라는 단어와는 좀처럼 매칭이 되지 않는다.
이런 고정관념을 깬 것도 모자라 런웨이 무대에 오른 것은 건설 현장에 설치된 푸른색의 수직보호망을 재활용해 만든 가방이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불리는 탄소 배출이 숙명인 화학 기업이 고안한 업사이클링(새활용) 제품이었기에 반응은 더욱 뜨거웠다. K패션에 관심이 많은 각국의 패션업계 관계자들과 셀럽들이 이 역설적인 발상에 호평을 쏟아냈다.
파격과 신선함을 동시에 안긴 이같은 시도는 그룹 경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김세민(34) ㈜이수 전략본부장(전무)의 손에서 출발했다. 그는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과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의 장남이다. 이수그룹 오너가 3세인 그는 이수그룹의 경영을 승계할 유력 후계자다. 김 전무를 최근 서울 서초구의 그룹 사옥에서 만났다. 그가 언론을 통해 인터뷰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수건설의 건설 현장을 찾았을 때 늘상 보던 파란 수직보호망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너무 나도 멀쩡한 이 소재가 한번 만 쓰고 버려지는 것이었어요. 게다가 건설 현장에서 사용되던 것이었기에 안전의 이유 때문에 재활용도 쉽지 않았어요. 당시 확신은 없었지만, ‘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무모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건설 폐자재’가 ‘패션 원자재’로 탈바꿈하는 첫 장면이었어요”
뉴욕과 파리를 거쳐 서울패션위크까지 누빈 업사이클링 백의 출발에 대해 김 전무는 이같이 회상했다. 김 전무는 스위스 에이글롱칼리지(Aiglon College)를 졸업한 뒤 영국 런던퀸메리대(Queen Mary University of London)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인 2016년 이수에 입사해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받아 나가고 있다.
현재 그는 그룹의 전략본부장을 맡아, 이수 그룹의 현재와 미래를 더불어 고민한다. 본부 산하 기획팀이 그룹 주력 사업들의 안정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사업 전개를 지원한다면, 오픈이노베이션(OI)팀은 이수 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챙긴다.
김 전무는 “이수가 영위하는 사업군의 대부분은 B2B 분야이고, 핵심역량도 우수합니다. 하지만, 역량이 소비재 분야까지 미치지 못하기에, 이수가 더 잘 할 수 있는 사업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의 이런 고민은 궁극적으로 기업의 지속가능한 경영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번 업사이클링 프로젝트도 이런 고민에서 출발했다. 김 전무는 “세계 최고의 글로벌 기업으로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목표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업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최근 기업의 화두가 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과 맥을 같이 한다. E·S·G는 현재 김 전무가 가장 크게 관심을 두는 분야다.
“E·S·G 경영이 큰 화두가 되면서 저희에게 맞는 E·S·G가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사회에 임팩트를 주면서 비즈니스를 투명하게 꾸려가자는 목표로 우선 ‘친환경’으로 잡았습니다. 폐기물들을 과거 방식대로 처리한다면, 우리의 터전인 지구는 점점 더 살기 어려운 환경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수 그룹도 역시 생산 활동의 부산물로 다양한 폐기물을 발생시키고 있죠. 우선 폐기물을 재활용 이상의 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런 철학에서 출발한 업사이클링 프로젝트는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김 전무는 “100% 완벽한 탄소중립적인 친환경 프로젝트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도전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가치에 집중해보기로 했습니다”라고 했다.
쉽지 않은 과제였던 만큼 일하는 방식과 기존의 사고를 깨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고 그는 전했다.
“‘건설’과 ‘패션’은 괴리감이 크잖아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 재미있게 풀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패션 아이템을 의류원단으로만 만드는 게 어쩌면 고정관념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죠. 폐자재가 원자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업사이클링 패션을 추구하는 얼킨 브랜드와 콜라보한 덕분에 ‘업사이클링 제품은 가치가 떨어진다’ 라는 편견도 떨쳐낼 수 있었습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현장의 모델 선정, 그리고 동선까지 직접 챙긴 이번 업사이클링 프로젝트는 대성공을 거뒀다. 파리 외에도 뉴욕과 서울 패션위크에 잇따라 참여하며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뉴욕과 파리의 패션위크 프로젝트가 업사이클링 제품을 글로벌 무대에 론칭한 자리였다면, 서울 패션위크에서는 국내 대중에게 이수그룹을 알리며 한발 더 다가가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고 그는 자평했다.
김 전무는 “평범한 가방인 줄 알았던 방문객들이 건설현장에서 나온 소재로 만들었다고 하니 관심을 가졌고, 요즘 대중들의 친환경에 대한 니즈와 눈높이가 높다는 것을 현장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첫 업사이클링 프로젝트의 성공을 토대로 김 전무는 차기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다. 방향성 또한 정립했다. 기업 홀로 거대한 환경 문제를 홀로 풀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소비자들과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로 ‘UCYCLE’이라 지었다.
그는 “먼저 화학, IT, 건설 등 이수그룹이 영위하고 있는 사업 분야에서 업사이클링 아이디어를 찾고 있다”며 “젊은 직원들이 참여할 수 있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해보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30대의 김 전무는 이른바 MZ세대다. 이제 막 그룹 경영에 몸을 담기 시작한 그다. 그래서 “아직은 경영이란 키워드, 경영인이라는 타이틀이 좀 어색하다”며 “경험도 부족하고, 증명해야할 것도 많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터뷰에서 그가 지향하는 기업가 철학은 분명해 보였다. 이는 현재 그가 직접 이끌고 있는 여러 사내벤처의 경험을 거치며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고 했다.
김 전무는 이를 기업가정신이라 정의했다. 그는 “사내벤처를 진행하면서 느낀 점은, 사업 아이템의 매력도도 중요하지만, 개개인의 기업가 정신이 제일 중요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이처럼 생각한 이유를 묻자 그는 “기업가 정신이 뒷받침되어야, 불확실성이 가득한 벤처를 이끌어 갈 수 있고 향후, 분사 이후 펼쳐지는 생존 위기를 돌파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며 “결국, 사내벤처는 불확실한 환경에서 불확실한 조건을 가지고 기업가 정신을 통해 생존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내벤처 육성을 통해 자신도 한번쯤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그룹 차원에서 적잖은 공력을 쏟으면서, 현재까지 2기를 진행한 사내벤처 프로젝트는 각 기수 때마다 50건이 넘는 아이디어가 접수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반려동물, 취미, E·S·G, 인테리어, 에듀테크 등 사업 분야 또한 다양해 지고 있다.
아직은 짧은 시간이지만, 김 전무의 이런 여러 시도들은 그룹 곳곳에 적작은 변화를 끌어내고 있다. 오너3세라는 세간의 시선과 중압감이 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격의 없는 소통으로 다소 보수적이고, 딱딱했던 그룹에 역동적이고 젊은 색깔을 더해가고 있다. 특히 그는 콜라보로 대표되는 융합에 큰 가치를 두며 주목을 받고 있다. 김 전무는 이미 최근 ‘브랜드재활성화’라는 목표를 세우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 중이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초 온라인 브랜드몰인 이수엑스몰을 오픈하며 소비자들에게 유연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다가가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 이수엑스몰의 ‘X’는 흔히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할 때 사용하는 크로스(Cross·교차)를 뜻한다. 이수그룹이 다양한 브랜드 혹은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를 통해 단순한 상품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를 갖는다. ‘브랜드 X 브랜드’, ‘기업 X 기업’, ‘제조업 X 소비재’ 등 이수그룹의 미래도 콜라보에서 그려질 수 있다고 김 전무는 믿는다.
그는 “콜라보레이션이 강력한 힘을 갖는 이유는, 기업과 작가가 함께 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가치가 발생하기 때문”이라며 “‘혼자’가 아닌 ‘함께’가 가치 창출의 답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고 설명했다.
서영상 기자
s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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