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기 들고 횡령해도 '쉬쉬'…40년 '전투' 노조, 탈피의 시간 왔다
[편집자주] 윤석열 정부가 새해 벽두부터 노동개혁에 힘을 쏟고 있다. 올해를 공정과 법치의 노동개혁 원년으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는 기업의 힘만으론 갈 수 없다. 노조의 탈법적 몽니가 횡행한 나라에 국내외 어떤 기업이 마음놓고 투자하고 일자리를 늘릴 수 있을까.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뿐 아니라 '노조의 사회적 책임'(USR)도 함께 고민할 때다.
#2. 2022년 10월 법원은 노조 조합비 중 1800만원을 개인 생활비 등으로 유용한 혐의로 F기업 노조 간부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사회봉사 80시간)을 선고했다. 또 G기업 노조 지부장은 3억7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 2년6월, H기업 노조 지회장은 투표함 바꿔치기와 조합비 횡령 혐의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또 법원은 지난해 12월 I기업 노조에서 10억원대 조합비를 횡령한 핵심 조합원에 대해 징역 4년을 선고했다.
대한민국 노동현장의 현실이다. '노조는 이래도 된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전투적 조합주의'에 기반한 1980년대식 폭력 투쟁 행태가 40년째 바뀌지 않고 있다. 외국 기업들이 한국 투자를 꺼리는 가장 큰 이유다. 불투명한 주먹구구식 노조 회계도 문제다.
노조가 언제까지나 '공정'과 '법치'의 사각지대로 남아있을 순 없다. 윤석열 정부가 새해 화두로 '노동개혁'을 제시하며 '노조의 사회적 책임'(USR, Union Social Responsibility)을 강조하는 배경이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12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노동법 및 회계·세법 전문가들과 '불합리한 노동관행 개선 전문가 자문 회의'를 열고 "노동조합의 사회적 위상과 영향력에 걸맞은 민주적이고 투명한 운영, '노조의 사회적 책임'(USR)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노동조합의 민주적이고 투명한 운영은 노사 대등성에 기반한 합리적인 노사관계의 기본 전제"라며 "노동조합 회계 투명성 강화를 통해 노동조합의 민주성과 국민적 신뢰를 제고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등하고 합리적인 노사관계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했다.
USR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처럼 노조도 사회적 책임을 요구 받는다는 개념을 담고 있다. 미국 칼 폴리 포모나대의 세드릭 도킨스(Cedric E.Dawkins) 교수 등이 2010년 즈음 처음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노조의 본질이 노동자들의 조합이긴 하지만, 오직 조합원들의 이익만 따져선 안 되고 고용자인 기업이 지속적으로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사회와 이해관계자 전체의 이익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얘기다.
국제표준화기구(ISO)는 2010년 11월 USR을 국제표준(ISO26000)으로 선포했다. 우리나라에선 LG전자와 LG이노텍, LG디스플레이 등 일부 기업의 노조가 2010년대 도입해 한때 관심을 끌었지만 널리 퍼지진 않았다. 민주노총 등 강경 투쟁 노선을 지향하는 노조 문화가 강해서다.
한국의 전투적 노조 문화는 경제 발전의 첩경인 외국인 투자를 저해하는 핵심 요인으로 지목된다. 2020년 한국경제연구원의 조사 결과, 종업원 100인 이상 주한외국기업의 54%가 "한국의 노사관계가 외국인투자 유치에 부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이들은 한국의 노조가 개선해야 할 관행으로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는 투쟁적 노조활동(46.4%) △상급 노동단체와 연계한 정치적 파업(30.4%) 등을 가장 꼽았다.
정부는 공정과 법치에 기반한 노동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USR의 개념을 통해 노조의 자발적인 혁신을 유도한다는 방침이다. 노조 스스로 불법적 투쟁을 자제하고 기업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고려한 선택을 내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고용부는 △노동조합 재정 부정사용 △불공정 채용 △직장내 괴롭힘 등 노동시장의 불법·부조리 근절을 위해 감독 역량을 집중하고 제도개선도 병행할 방침이다. 또 노조의 회계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노조 회계감사원의 독립성·전문성 제고와 노조 회계 공시시스템 구축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정부의 노동개혁 관련 전문가 논의기구 미래노동시장연구회에 소속된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노조도 약자를 보호할 사회적 책임을 함께 부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석열정부 노동개혁의 밑그림을 그린 미래노동시장연구회에 참여한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노동개혁의 시급성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 앞으로의 노동개혁은 과거의 진영 간 이념싸움이 아닌 구조적 대변화에 대응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노·사·정이 공동 책임을 부담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게 권 교수의 조언이다.
권혁 교수는 12일 머니투데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권고문의 배경과 우리사회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권 교수는 지난해 7월 고용노동부의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에 따라 출범한 전문가 논의기구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전문가 간사로 참여했다.
권 교수는 "지금 우리나라의 노동법·노동제도는 현실과 너무 괴리돼 있다"는 진단으로 운을 뗐다. 그는 "노동법이 만들어진 시점과 지금 노동시장의 상황이 너무 다르다보니 반드시 법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이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법의 사각지대에 있고 객관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사람을 찾아 적절히 보호해야 우리 경제가 지속가능한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정부의 노동개혁에 대해 "이념 혹은 이슈 싸움으로 흘러간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과거에는 근로시간을 얼마나 줄이는가, 최저임금을 얼마나 올리느냐 등 수치로 설명할 수 있는, 일명 '승패가 있는 싸움'을 해왔다면 앞으로의 노동개혁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구조적 문제에 대해 노사정이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고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권 교수는 "노동 문제는 구조적으로 이념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지나치게 이념적·정치적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다보니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있다"며 "(제도의 변경으로) 노동계를 탄압한다고 보거나 정치적으로 주고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기득권자들이 어떤 양보를 할 것이냐 구조를 새로 모색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발표한 권고문은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하느냐 아니냐하는 디테일한 문제가 아니라 노동시간을 앞으로 어떻게 볼 것이냐의 고민을 담은 것"이라며 "우리 사회가 노동시장의 양극화와 이중구조 문제를 해소하고 고령화 시대에 앞서 지속가능성을 키우기 위한 질문을 던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현재의 우리 노동시장을 진단한 '녹서'(그린북)를 펴냈다면 노사는 그 문제점을 해결할 '백서'(화이트북)를 만들어야한다는 얘기다. 권 교수는 이번 정부에서 강조하고 있는 '노조의 사회적 책임'(USR)에 대해서도 "노조가 약자를 보호할 책임을 함께 부담해야한다"며 "누가 사회적 약자이고 어떻게 보호할 것이냐에 대해 양보와 타협, 진단을 해내야 한다"고 했다.
권 교수는 "노동개혁 과정에서 보수와 진보같은 이데올로기 경쟁은 불가피하지만 조금은 냉철하게, 과잉된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 본연의 문제를 진단했으면 좋겠다"며 "미래 노동에 관련한 구조적 변화를 고민하고 보호해야 할 노동계층에 대한 실효적 보호를 통해 과거 산업화시대 구현한 '노동 1.0'에서 벗어나 '노동 2.0'을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진우 기자 econphoo@mt.co.kr, 세종=김훈남 기자 hoo13@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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