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피렌체 서적상이 목격한 르네상스 현장
서적상 베스파시아노와 친구들 이야기
‘책 사냥’과 필사본 제작 과정 생생
피렌체 서점 이야기
‘세계 서적상의 왕’ 베스파시아노, 그리고 르네상스를 만든 책과 작가들
로스 킹 지음, 최파일 옮김 | 책과함께 | 3만5000원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를 대표하는 이미지라면 아무래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우아한 돔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와 함께 산타 크로체 성당과 베키오 궁전 같은 아름답고 화려한 건축물들, 다비드상과 <비너스의 탄생>을 비롯한 숱한 걸작이 소장된 미술관들이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을 이탈리아 중부의 이 옛 도시로 끌어들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브루넬레스키 같은 천재들이 이곳을 무대로 활동했고, 피렌체의 정치적·경제적 기둥이었던 메디치 가문이 이들을 후원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만으로 피렌체 르네상스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겉으로 드러난 건축물들과 미술 작품들을 밑에서 떠받치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인문주의 정신이 그것이다. <피렌체 서점 이야기>는 15세기 피렌체의 서적상 베스파시아노 다비스티치를 중심으로 당대의 학자, 필경사, 책 사냥꾼, 사제 등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지식 혁명의 풍경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 낸다. 지은이 로스 킹은 <브루넬레스키의 돔>을 비롯해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천장> <다 빈치와 최후의 만찬> 등이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피렌체 르네상스 전문 역사 저술가다.
르네상스라는 말이 역사학의 일반 개념으로 쓰이게 된 데에는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명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부르크하르트는 미술사 연구를 위해 로마를 찾았다가 바티칸 도서관의 오래된 필사본을 바탕으로 출간한 책 한 권을 접하고 연구 주제를 바꾸게 된다. <103인 명사들의 생애>라는 그 책의 지은이가 바로 베스파시아노였다. 그 책은 “교황, 국왕, 대공, 추기경, 주교부터 (…) 잡다한 학자와 작가들까지 다룬 열전(약전 모음)이었다. 이 명사들의 공통점은 베스파시아노가 그들을 잘 알았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의 가까운 친구이자 오랜 고객이었다.” 부르크하르트는 베스파시아노가 “15세기 피렌체 문화의 첫째가는 권위자”이고, 베스파시아노의 그 책이 자신에게 “대단히 중요”했다고 밝혔다. 고대 저작의 재발견이 어떻게 ‘르네상스’를 탄생시켰는지를 논구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베스파시아노에게 크게 빚진 것이었다.
베스파시아노는 집안 형편 때문에 열한살 어린 나이에 서적상 점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교육 혜택은 받지 못한 처지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일터인 서점과 거리가 곧 학교였다. 서점에는 숱한 지식인들이 드나들었고, 그들은 서점 안팎에서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저녁 만찬이나 강연회에서는 최고 권위의 학자로부터 강의를 들을 수도 있었다. 베스파시아노가 서점에서 일을 시작한 무렵 에우게니우스 교황이 교황청 내부의 복잡한 사정 때문에 로마에서 도망쳐 피렌체에 머무르게 된다. 고등교육을 받은 외교관, 서기, 학자, 라틴어 전문가 들로 구성된 교황청 관료들이 교황과 함께 오면서 피렌체는 “아르노강 변의 새로운 아테네”가 되었다.
‘새로운 아테네’를 가능하게 한 두 축은 사라지거나 잊힌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들을 찾아내는 일과 그것들을 되살려 퍼뜨리는 일이었다. ‘책 사냥꾼’들은 폐허가 되다시피 한 수도원 도서관들을 다니며 방치된 채 스러져 가는 옛 책들을 찾아냈고, 필경사들이 그것을 양피지에 다시 옮겨 썼으며, 베스파시아노 같은 서적상들이 그것을 고객들에게 팔았다. 사실 베스파시아노의 서적상은 단순히 책을 팔기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손님들이 원하는 책을 찾아서 필사본을 만들어 제공하는 일이 주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필사본을 만드는 과정도 단순하지 않았다. “그것은 양피지 제조공부터 필경사, 세밀화가, 금박공, 심지어 약종상과 목수, 대장장이까지 일련의 장인들과 수공업자들의 전문 기술을 요구하는, 몇 달 심지어는 몇 년이 걸리는 다단계 공정이었다.”
베스파시아노는 여러 필사본들 가운데 가장 정확한 판본을 찾아내고, 필경사를 물색하며, 책을 제본하는 이 모든 과정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통했다. 로마 학자 플리니우스의 <자연사>(박물지)의 새로운 필사본을 제작할 계획을 세운 수도원장 지롤라모 알리오티는 “우리 베스파시아노는 그런 일에 최상의 안내자”라고 1446년에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베스파시아노의 활동 전성기에 필경사 중 한 사람은 그를 가리켜 “피렌체 서적상의 군주”라고 했고, 어떤 고객은 그를 “세계 서적상의 왕”이라고 일컬었다. 밀라노의 한 인문주의자는 가장 아름다운 책은 피렌체에서 나온다며 이렇게 썼다. “그곳에는 베스파시아노라는 사람이 있는데, 책과 필경사에 전문 지식을 갖춘 탁월한 서적상으로서, 이탈리아의 모든 사람들과 외국인들 역시 시중에 나온 우아한 책을 찾고자 할 때 그에게 의존한다.”
베스파시아노의 고객에는 메디치 가문의 수장들인 코시모와 조반니, 로렌초를 비롯해 교황 니콜라우스 5세, 용병대장이자 책벌레였던 페데리코 다몬테펠트로, 인문주의자 베사리온 추기경, 아라곤과 나폴리의 국왕 알폰소 등이 포함되었다. <피렌체 서점 이야기>는 베스파시아노가 이런 고객들과 협업해 가며 필사본 책을 만들고 공급하는 이야기를 한 축으로 삼고, 그의 지인들이 희귀 필사본을 발견하고 플라톤 전집을 비롯한 고전을 번역하는 등의 이야기를 다른 한 축으로 삼아 피렌체의 인문주의 풍경을 직조해 낸다.
베스파시아노는 필사본의 전성기를 살면서 최소 1천권의 필사본 제작에 직접 관여하는 등 그 안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필사본의 쇠퇴와 인쇄본의 등장이라는 시대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필사본을 고집하며 인쇄본에 부정적이었고,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피렌체에 인쇄기 도입이 느렸던 데에는 그의 존재 역시 큰 몫을 했다. 인쇄본의 대두가 그의 노화 및 은퇴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셈이었다. 은퇴한 뒤 그는 저술 활동에 주력하면서 기독교 신앙 쪽으로 급격히 쏠렸고, 죽은 뒤에는 산타 크로체 성당 바닥 가족묘에 안장되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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