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공포가 환상을 입고 시가 되었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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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젤과 그레텔을 마녀의 숲으로 몰아넣은 것은 폭력과 굶주림이었다.
시간은 "둘이서 한 섬에 살던 여름"이고 공간은 "깊은 숲속에서 양치식물의 포자가 금빛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나는 곳이다('헨젤과 그레텔의 섬'). 남매가 함께 사는 섬은 코끼리였고, 코끼리였고 섬인 그것의 이름은 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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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젤과 그레텔의 섬
미즈노 루리코 지음, 정수윤 옮김 l 읻다(2022)
헨젤과 그레텔을 마녀의 숲으로 몰아넣은 것은 폭력과 굶주림이었다. 어린 남매는 돌멩이와 빵 부스러기를 떨어뜨리며 가는 길을 표시하지만, 새들이 빵 부스러기를 먹어버리는 바람에 돌아가는 길을 잃고 만다. 버림받은 남매는 부모의 학대에서 출발해 마녀의 집이라는 또 다른 폭력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이내 새로운, 그러나 어딘가 낯익은 공포가 시작된다. 동화 속 남매는 마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용기와 꾀를 내어보지만, 현실의 공포에 사로잡힌 어린 남매에게도 그런 여지가 주어질까? 더욱이 그 현실의 공포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이자 최악의 전쟁으로 평가받는 2차 세계대전이라면? 심지어 그들이 대공습을 피해 숨어든 방공호의 위치가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일본이라면?
<헨젤과 그레텔의 섬>은 1932년 도쿄에서 태어난 시인 미즈노 루리코가 공습과 굶주림, 두려움으로 점철된 자신의 유년을 1983년에야 동화 같기도 하고 신화 같기도 한 신비로운 언어로 승화시킨 시집이다. 시인은 “시를 막 쓰기 시작했을 때는, 오롯이 나만의 사상이나 관념을 획득하지 못하면 시를 쓸 수 없다고” 믿었지만 <헨젤과 그레텔의 섬>을 쓰면서 자신에게 적합한 시의 문체를 발견하고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해방감을 얻은 것 같다고 한국어판 기념 서문에 밝히기도 했다.
시인이 해방감을 느꼈다는 시에는 공포의 현실에서 환상에 눈을 뜬 아이들이 존재한다. 시간은 “둘이서 한 섬에 살던 여름”이고 공간은 “깊은 숲속에서 양치식물의 포자가 금빛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나는 곳이다(‘헨젤과 그레텔의 섬’). 남매가 함께 사는 섬은 코끼리였고, 코끼리였고 섬인 그것의 이름은 도라다. 그곳에서는 다리 달린 물고기들이 계단을 올라와 우리의 이야기를 엿듣는다. 오빠 말에 의하면 도라는 “세계의 미숙한 원형”이다. “도라에게서 발산되어 무한히 이어지는 녹색 모음 계열은 다시금 도라의 귀로 되돌아가고 도라는 듣고 있다”(‘도라의 섬’). “여동생은 하늘색 도화지 가득 온갖 모양의 새를 그렸다. 굵은 다리와 긴 목 또 굵은 다리와 긴 목 동생이 그린 새는 하나같이 날개가 없었다”(‘모아가 있던 하늘’). 쫓기던 코끼리들은 섬 위에 멈춰서 조금씩 나무가 되었다. 나무는 랑그라는 코끼리가 되었다. 랑그는 “육지의 길고 건조한 세기에 대하여 허공에 매달려 바싹 말라버린 갖가지 형태의 살과 피에 대하여 꼼짝없이 붙들려 구경거리가 된 수많은 목소리에 대하여” 말했다(‘코끼리 나무 섬에서’). 우리가 버린 나무의 집이 “누레진 밤의 지도 위에 썩어가고 있다”(‘나무의 집’). 오빠는 매일 밤 성냥개비 한 개를 손에 들고 나무의 집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기를 소망하지만, 그 안에 우리가 그려두었던 이상한 동물들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호주머니에 더는 빵 부스러기나 조약돌이 남지 않은 짧은 여름의 끝에 오빠는 죽었다. 나는 한 개비 성냥이 아닌 굵은 붓 한 자루 갖기를 바란다. 시인의 오빠는 전쟁이 끝나고 결핵과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즈노 루리코는 푸른 어둠 같은 알 속에 웅크리고 있던 어린 시절 자신을 흔들어 깨워 그 손에 붓 한 자루를 쥐여주고 비로소 자유로운 시인이 되었다.
소설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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