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시에 운명에 가격당했던 이들이 주는 매콤한 자유 [책&생각]

한겨레 2023. 1. 1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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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비실에 앉아 밤을 지새운다.

외출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하는 일이다.

사진 문제로 여자와 투닥거리던 남자가 불이 난 현장으로 가봐야겠다고 말하고, 네 사람은 모두 경비실 바깥으로 나가 밤의 언덕으로 달려간다.

사람의 팔을 든 중년 남자와 그 일행이 헤치고 나아가는 밤의 모습이, 분위기와 공기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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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의 책들 사이로]정아은의 책들 사이로

나이트 러닝

이지 지음 l 한겨레출판(2022)

‘나’는 경비실에 앉아 밤을 지새운다. 외출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하는 일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신문’과 ‘기능만이 전부인 달력’이 걸려 있는 곳에서 상념에 잠겨 있는데, 시시티브이(CCTV)에 뭔가가 지나가는 게 보인다. 시시티브이가 놓인 장소로 가 보니 흰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서 있다. 여자는 다짜고짜 사진을 바꾸고 싶다고 말한다. 기상캐스터 공채에 뽑혔는데, 응시 원서에 넣었던 사진을 다른 것으로 교체하고 싶다는 것이다. 늦은 밤, 건물에 그 요청을 들어줄 사람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만 여자는 막무가내다. 여자와 실랑이를 벌이는데 아버지가 돌아온다. 땀으로 흠뻑 젖은 아버지는 불이 났다고 말하며 손에 든 물체를 보여준다. 물컹해 보이는 길고 가는 물체, 소시지를 닮은 물체다. 물체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말한다. “팔이야. 사람의 것 같아.” 과연, 그것은 사람의 팔이었다. 손과 손가락이 멀쩡하게 달린 팔. 그때 또 다른 남자가 등장해 여자와 실랑이를 벌인다. 사진 문제로 여자와 투닥거리던 남자가 불이 난 현장으로 가봐야겠다고 말하고, 네 사람은 모두 경비실 바깥으로 나가 밤의 언덕으로 달려간다.

순식간에 의기투합해 밤을 향해 달려가는 네 사람의 이야기는 기괴하다. 현실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이상한’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네 사람이 함께 있는 밤 풍경이 절로 그려진다. 사람의 팔을 든 중년 남자와 그 일행이 헤치고 나아가는 밤의 모습이, 분위기와 공기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전통적인 이야기 형식과는 거리가 먼 이 짧은 소설은 네 사람이 함께 달리는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띤다. 등장인물들의 사연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독자가 받는 느낌은 ‘기괴함’에서 ‘애틋함’으로 바뀐다. 낯선 이에게 다가갈 때 보여주었던 투박함은 그들이 지나온 삶의 여정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었다. 한참 달리던 도중, 일행은 ‘소시지를 닮은 팔’의 임자와 마주친다. 그리고 그 팔의 임자가 스스로 팔을 잘랐음을 밝혔을 때, 사진을 바꿔달라고 생떼를 썼던 여자가 내면 깊숙이 담겨 있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여자는 간절한 염원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 잊지 못했고,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잊지 못할 기억. 그 기억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 여자의 기억은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네 사람은 각자의 기억을 곱씹으며 다시 달린다.

인상적인 것은 이들이 과거의 어느 순간 갑자기 닥쳐온 사건에 대응했던 방식이다. 이들은 운영하던 카페의 간판에서 철자 하나가 떨어져 나갔을 때 남은 철자들의 조합을 카페의 이름으로 삼고, ‘한쪽 팔을 잘라서라도’라는 표현을 본 뒤에는 그 비유를 따라 제 팔을 잘라버리는 사람들이다. 불시에 운명에 가격당했을 때 그 내리침을 그대로 끌어안아 버리는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독자는 역설적이고 매콤한 자유를 느끼게 된다. 말장난과 자학적인 코드가 아이러니와 뒤섞이며 강렬한 현실감을 주는 이 기묘한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며 거대한 농담으로 화한다.

정아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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