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산골의 맑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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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목에 떠놓은 자리끼는 밤사이 냉수가 되었고, 학당 앞 개울가에는 살얼음이 단단히 잡혔다.
"밤하늘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달(月)/ 개울가를 스치고 불어오는 바람(風)/ 일반적이지만 맑고 의미 있는 것들(一般淸意味·일반청의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나만의 작은 행복." 소강절이 지은 '청야음(淸夜吟)'이란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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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서 즐기는 한가로움
일상속 소소한 여러 행복이
다산 정약용이 강조한 청복
작고 낮고 부드러운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현명
윗목에 떠놓은 자리끼는 밤사이 냉수가 되었고, 학당 앞 개울가에는 살얼음이 단단히 잡혔다. 소한을 지나 대한으로 가는 길목 여기저기에는 얼음과 잔설이 매복하여 겨울의 행군을 더디게 한다. 아침 햇볕이 산등에 비추려 하면 이내 어둠이 낮을 대신해 산허리에 급하게 등장한다. 동지가 지났지만 밤은 낮보다 길고, 하루는 여전히 매섭고 우울하다.
그래도 세상은 마냥 힘들고 죽으라는 법은 없다. 암울한 상황에도 짬짬이 느끼는 작은 행복이 있다. 장작난로 위에 가래떡과 고구마는 익어가고, 알이 통통한 도루묵은 겨울 추위를 잊을 정도로 혀에 감긴다. 여수에서 올려 보낸 윗마을 점터 홍 처사 댁의 싱싱한 생굴은 막걸리와 합이 되어 겨우내 언 마음을 풀어준다.
일상의 작은 행복이 어찌 입에 맞는 음식뿐이랴. 울산에서 정성 가득한 글씨를 담고 날아온 제자의 신년 카드,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애창곡, 먼 길을 마다 않고 방문한 어릴 적 친구, 지역주민 할인 목욕탕에서 한가로운 목욕 등 헤아려보니 산골 학당에서 느끼는 작지만 맑은 행복이 한둘이 아니다.
다산 정약용은 행복을 열복(熱福)과 청복(淸福)으로 나누어 청복의 맛을 강조했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부자가 되어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사치와 호사를 누리는 화끈한 행복인 열복도 좋지만, 나만의 소소한 즐거움을 만들며 사는 맑은 행복인 청복의 맛도 그만 못지않다고 한다. 복어도 비싼 참복만 맛있는 것이 아니라 까치복·은복도 그들만의 고유한 맛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조정에서 잘나가던 다산이나, 유배지에서 18년을 보낸 다산이나, 결국 서로 다른 맛일 뿐이지 경계를 지어 좋고 나쁜 시절로 구분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하늘과 땅으로 엮은 육십갑자 한바퀴를 다 돌고 맞이하는 요즘, 지난 시절 아쉬움이 있다면 경계를 만들고 성을 쌓으며 살았던 시절의 후회다.
행복과 불행도 똑같이 행(幸)이 들어간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행복의 맛도 불행의 맛도 각자의 맛일 뿐, 좋고 나쁨의 경계를 지을 필요가 없다. 천국과 지옥 역시 서로 다른 삶의 터전이고, 정상과 골짜기 역시 서로 다른 산의 부분일 뿐이다. 지나고 보면 큰 것 한방보다는 작은 것 여러방이 오히려 더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조그만 것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하다고 노자는 말한다(見小曰明·견소왈명). 크고, 높고, 대단하고, 강한 것도 좋지만 작고, 낮고, 부드러운 것 역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인생이 어찌 거창하고 대단한 것에서만 행복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인생의 오복을 장수, 부, 건강, 명성, 행복한 말년이라고 말하지만 그 모든 복을 다 누리며 사는 사람이 몇명이나 있겠는가?
대단한 인생도 멋진 인생이지만 단단한 인생 역시 멋진 인생이다. 특별함도 좋지만 일반적인 것도 아름답다. “밤하늘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달(月)/ 개울가를 스치고 불어오는 바람(風)/ 일반적이지만 맑고 의미 있는 것들(一般淸意味·일반청의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나만의 작은 행복.” 소강절이 지은 ‘청야음(淸夜吟)’이란 시다. 작지만 맑고 의미 있는 나의 일상, 그 작은 것 안에서 청복을 찾은 어느 현명한 시인의 노래가 가슴에 닿는다. 세상에 즐겁지 않은 일이 없고, 행복하지 않은 시간이 없고, 의미 없는 장소는 없다. 겨울은 추운 게 맛이다. 봄을 서둘러 동경하지 말자.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놔두고 간섭하지 말자. 오늘 여기서 나의 맑고 의미 있는 작은 행복에 집중하자. 오늘은 뭘 먹어야 행복할까?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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