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행성어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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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칼럼을 오래 쓰다보니 혹시 비슷한 이야기를 할까 싶어서 가끔 옛날에 쓴 것을 뒤져 본다.
그래도 이곳 행성어를 아는 사람은 수백명 남짓이고 이곳 주민들도 관심이 없기에 이 서점의 이용자는 곧 사라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연을 들어보니 선천적으로 뇌에 통역 모듈을 설치할 수 없어서 은하계 여행을 포기했다가 행성어 서점의 존재를 알고 떠다니는 교본을 통해 이곳 행성어를 공부했다는 것이다.
이제 자라나 MZ세대가 된 그들의 생각과 언어는 행성어쯤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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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칼럼을 오래 쓰다보니 혹시 비슷한 이야기를 할까 싶어서 가끔 옛날에 쓴 것을 뒤져 본다. 특히 새해 결심은 비슷해질까봐 유독 주의한다. 10년 전 칼럼을 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아들이 묵언수행을 하고 있어 아이의 마음을 읽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담은 글이다. 그 아들은 어느덧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며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당시에는 청소년의 마음을 읽기가 어려웠다면 요즘은 이른바 MZ세대(1980∼2000년대에 태어난 세대)의 생각을 아는 것이 어려워 이래저래 여전히 아들의 마음을 잘 모르고 지낸다.
김초엽 작가의 짧은 소설 <행성어 서점>은 먼 미래 이야기이다. 소설에선 은하계 행성 여행이 자유로우며 인류의 모든 뇌에 수만개 은하 언어를 지원하는 범우주 통역 모듈을 심어놔 언어 장벽도 허물었다. 작은 시골 행성에 있는 행성어 서점에는 많은 관광객이 오지만 그들은 곧 당황한다. 전자뇌의 통역 모듈로도 해석할 수 없는 이 행성의 고유어로 적힌 책들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책은 읽히지 않는 언어라는 기념품으로 팔려서 유일한 직원인 나의 월급을 주며 유지하기에 충분하다. 그래도 이곳 행성어를 아는 사람은 수백명 남짓이고 이곳 주민들도 관심이 없기에 이 서점의 이용자는 곧 사라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0년 전 이 서점에서 일을 시작할 때는 젊은 패기에 ‘행성어 교본’을 만들어 올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서점이 망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 수상한 손님이 보인다. 사흘 전부터 매일 서점에서 책을 두세권씩 사 가는 그녀는 뉴스에서 본 행성 테러범과 인상착의가 비슷하다.
유심히 지켜보던 여자가 어느 날 말을 걸어오는데, 이상하다. 이곳 행성어를 쓰는 것이다. 이 책들을 읽을 줄 안다는 뜻이다. 사연을 들어보니 선천적으로 뇌에 통역 모듈을 설치할 수 없어서 은하계 여행을 포기했다가 행성어 서점의 존재를 알고 떠다니는 교본을 통해 이곳 행성어를 공부했다는 것이다. 내가 올린 행성어 교본이었다.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 나의 언어를 하는 그가 반갑기만 하다.
한동안 청소년 언어를 외계어라 불렀다. 이제 자라나 MZ세대가 된 그들의 생각과 언어는 행성어쯤 될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세대 차이는 있었고 기성세대와 젊은세대의 생각은 달랐다. 하지만 그때는 인간의 뇌에 세대간의 생각 차이를 통역하는 장치가 있었나 보다. 이제는 그 장치가 노후화해 더이상 서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나라, 아들의 나라, 딸의 행성, 엄마의 행성, 우리는 서로 다른 곳에 산다. 불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서로 공부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선을 그었을 뿐인데 담이 쌓이고 벽이 높아졌다.
사실 불통이 세대 차이뿐이겠는가? 지역 차이와 이념 차이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느낌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우리가 그었던 선을 지우고, 벽을 허물고, 다시 큰 원을 그려서 그 속에 우리 모두를 초청하면 어떨까? 미래 소설에서 행성 차이로 느끼는 괴리감이 같은 나라에서 지금 펼쳐진다는 것이 이제는 두렵기까지 하다. 그래서 오늘 밤 아들 나라의 마음 언어를 공부한다.
김재원 (K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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