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속도전에 쪼개진 토론회... 전범기업 사과 ·배상 흐지부지
외교부가 12일 일본 전범기업 대신 우리 기업이 내는 기부금으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 우리 대법원 판결에서 패소한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에 정부가 앞장서 면죄부를 주는 모양새가 됐다.
일본의 사과와 직접 배상을 요구해온 피해자 측은 "외교적 참사"라고 반발하며 "정부와의 신뢰가 파탄났다"고 격분했다. 피해 당사자 의견을 무시하다 끝내 좌초한 2015년 위안부 합의의 전례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의욕적으로 한일관계 개선을 추진해온 윤석열 정부의 외교구상이 삐걱대고 있다.
‘청구권 수혜’ 포스코에 40억 기금 요청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은 이날 공개토론회에서 “(민관협의회) 검토 결과, 핵심은 ‘법리 선택’보다 ‘피해자들이 제3자를 통해 우선 판결금을 받는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제3자가 전범기업의 채무를 대신 인수하고, 국내 기업의 기부금으로 채권자인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는 방식이다. 전범기업이 뒤로 빠지더라도 누구든 배상만 하면 상관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강제동원 해법으로 이 같은 대위변제를 공식화한 것은 처음이다.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 15명 가운데 생존자가 3명에 불과해 시간이 촉박하고 △일본의 반대로 협상에 속도가 붙지 않는 데다 △국내 진출 일본 기업 자산의 강제 현금화 조치가 여의치 않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불가능한 최선보다는 가능한 차선'이 낫다는 논리다.
이에 (제3자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포스코에 40억 원 기금을 요청한 상태다. 포스코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혜택을 입은 대표적 기업이다. 심규선 재단 이사장은 “다른 청구권 자금 수혜 기업에서도 최소 40억 원 이상을 기부받아 (피해자) 유족들만을 위해 쓰겠다”고 밝혔다.
서 국장은 “한일 양국 입장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피고 기업의 판결금 지급을 이끌어내기는 사실상 어렵다”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창의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자 동의 없이 재단이 채권 인수 가능?
정부의 ‘창의적 접근’은 채권자인 피해자 동의 없이 제3자가 채무를 인수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른바 ‘병존적(중첩적) 채무 인수’다. 가령, 교통사고가 나면 제3자인 보험사는 피해자에게 먼저 배상하고 추후 구상권을 청구한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 채무는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 민법 469조는 제3자의 채무 변제를 허용하지만 ‘당사자의 의사표시’를 단서로 달았다. 피해자 동의가 전제조건인 셈이다.
하지만 토론회에 참석한 최우균 변호사는 “민법 규정은 사적 원칙이 적용돼 당사자 의사표시가 중요하지만 이번 건은 대법원 확정판결로 채권을 발행한 건”이라며 “판례에 따르면 당사자의 의사표시가 갈릴 경우, 중첩적 채무 의사로 보기 때문에 재단이 전범기업의 채무를 인수하는 게 가능해진다”고 설명했다.
피해자 측 “본질 호도하는 잘못된 프레임”
강제동원 피해자 측은 “정부안은 외교적 참사로 본질을 호도하는 잘못된 프레임”이라고 비난했다. 법률대리인 임재성 변호사는 “결국 일본이 아무 부담을 지지 않는 방안”이라며 “외교부는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을 자꾸 이야기하는데 과연 그 호응이 무엇인지 답해달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지금 피해자들은 외교부와의 신뢰관계가 완전히 파탄 난 상황”이라고 했다. 외교부는 피해자 측과 상의 없이 지난해 7월 대법원에 “전범기업의 자산 매각 명령 확정 판결을 미뤄달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하고, 지난해 12월에는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의 국민훈장 수훈을 막았다.
방청석에서는 “매국노”를 비롯한 각종 고성과 욕설이 터져 나왔다. 질문자로 나선 피해자 측이 격분해 마이크를 내던지며 아수라장으로 치닫자 주최 측은 서둘러 자리를 마무리했다. 토론회장 밖에서는 야당 의원들과 시민단체가 비상시국선언을 통해 "강제동원 해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기만하고 역사를 속이는 야바위판을 벌이고 있다"며 "국민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규탄했다.
‘일본에 책임 묻기’도 미지수
이날 정부가 공개한 해법에 일본 측의 책임은 빠져 있다. 완강히 버티는 터라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 결과 배상금 재원 마련에 누가 참여하고, 어떤 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할지 불투명하다. 결국 일본이 아닌 우리 기업이 모든 금전적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돈을 포기하는 대신 일본 정부나 기업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세 외교'라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2019년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이 발의한 일명 ‘문희상안’(한일 양국 기업의 기부금으로 피해자 위자료 지급)보다도 후퇴한 셈이다. 정부가 일본과의 오랜 협상을 통해 대체 무엇을 얻었는지 의아한 부분이다. 심 이사장은 "(포스코 등) 국내 기업이 기부금을 낼 의무도, 재단이 요구할 권리도 없다"며 "유일한 방법은 이를 강제할 특별법 제정"이라고 말했다.
정승임 기자 choni@hankookilbo.com
문재연 기자 munj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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