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세상] 전기본을 폐지하자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은 향후 15년간의 전력수급의 기본방향을 담는 법정 계획으로, 2년 단위로 산업통상자원부가 수립한다. 수급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수요를 예측하고 이에 따른 공급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골자다. 이제까지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경제 성장과 소비 증가에 따라 에너지 수요도 계속 늘어나는데, 발전소를 짓는 데에는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를 미리 예상하지 않으면 수급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바다와 남북 분단이라는 조건으로 인해 ‘에너지 섬’의 처지이고 캐내어 쓸 수 있는 석탄 석유 자원도 거의 없는 데다가 급속한 전기화까지 이루어져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의 중요성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일년 중 한날한시라도 발전량보다 수요량이 많으면 ‘블랙아웃’ 같은 사태가 날 수 있거니와, 정부의 정책 기조는 언제나 안정적이고 저렴한 에너지 공급이었다.
하지만 먼저 전력 수요를 전망하고 이에 따라 목표 수요와 목표 설비를 산출하고, 거기에 맞추어 발전 설비 구성과 건설 계획을 수립하는 단순한 방식은 언제나 ‘보수적’인 전기본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15년 뒤의 수요 예측을 정확히 하기 어려우니 수요 증가와 설비량을 모두 넉넉하게 잡는 것이다. 그래서 2002년 1차 전기본이 수립된 이래 결과적으로 전기는 늘 남는 편이었다. 한여름과 한겨울 며칠간 수급 위기가 오곤 하지만, 수요 대비 공급 가능 발전량을 말하는 전력예비율은 일년 중 대부분 목표 기준인 22%를 훨씬 넘는다.
한편 전기본의 단위가 15년인 이유는 원전 건설에 10년 이상이 소요되는 탓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원전이 주력 발전원이 아니거나 원전의 추가 건설이 필요 없다면 전기본은 5년 이하를 기준으로 해도 된다. 그리고 총 발전 설비를 크게 늘리지 않으면서 대신에 재생에너지와 백업 전원 중심으로 발전원이 구성되고 수요 관리와 결합하는 방향으로 전력 정책 기조가 바뀐다면 전기본 자체를 폐기하고 전력수급 관리 지침 정도로 대체할 수도 있다.
산업부가 2036년까지 원전과 신재생을 합쳐서 전력의 65%를 공급하는 것을 내용으로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국회에 보고했다는 소식이다. 원전이 32% 이상으로 늘어났고 전 정부에서 30% 이상을 목표로 했던 재생에너지는 21%로 줄어들었다. 야당과 환경단체에서는 이런 구성으로는 탄소중립도 불가능하고 국제 추세에도 맞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윤석열 정부의 원전 최강국과 원전 생태계 복원이라는 신념이 종합적인 고려가 필요한 전력 정책을 뒤흔들고 있다는 우려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조차 안일한 것이 아닐까? 하루빨리 탄소배출 정점을 지나고 감축이 시작되어야 한다면 전력 수요 역시 정점이 필요하다.
기후 비상사태 속에서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전력 공급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언젠가는 공급보다 수요 관리가 정책과 계획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것이 지금일 수도 있다. 10차 전기본뿐 아니라 국가 에너지 계획의 전제와 기조를 원점 재검토해야 한다.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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