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강한 악당 꺾는 드라마가 보고 싶다
강자 맞서 대통령 된 자가 이젠 약자를 짓밟는 역설
김두현 변호사
드라마의 ‘빌런’(주인공과 대척점에 있는 악역)은 주로 재벌이다. 주인공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악역이고, 악역은 세면 셀 수록 꺾었을 때의 쾌감이 크다. 재벌이 아니라도 어쨌든 빌런은 센 놈이어야 한다. 강한 악당을 꺾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더 글로리’의 동은이는 부잣집 연진이를 응징해야 복수가 완성되듯이.
월드컵에서는 호날두를 꺾어야 제맛이고, 프로야구 롯데는 1위 팀을 잡아야 기분이 난다. 얼마 전 개봉한 만화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는 최강팀 ‘산왕공고’로 진학할 거냐는 질문에 산왕공고를 꺾는 게 더 좋다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지. 산왕에 입학해 북산을 꺾고 우승해서는 드라마가 안 된다. 북산에 입학해 산왕을 꺾었기에 슬램덩크는 명작이 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약자보다 강한 악당을 꺾길 바란다. 하지만 드라마가 아닌 현실은 다르다. 소수자 약자를 혐오하고 때려잡는데 익숙하다. 강자에 저항하는 약자를 외면하고 오히려 그를 공격하기도 한다.
정부가 안전운임제 확대를 요구하는 화물연대의 파업을 말 그대로 힘으로 ‘제압’했다. 안전운임제는 화물노동자의 최저임금제다. 화물기사는 실질은 노동력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노동자이지만, 형식은 개인사업자인 소위 ‘특수고용노동자’다. 백화점 판매원, 학습지 교사, 택배기사, 야쿠르트 판매원까지. 당연히 노동자로 생각되는 많은 사람이 계약상으로는 ‘사장님’이다. 길가다 “김 사장님”을 부르면 반이 돌아본다지만 이들은 돌아보지 않는다. 그들 누구도 자신을 사장님이라 여기지 않는 까닭이다.
화물기사들은 사장님이어서 최저임금법도 적용받지 못했다. 주 52시간 근로시간 제한도 없고, 공휴일도, 연차휴가도 없이 밤새 도로를 달려야 했다. 이들이 운전하는 트레일러 차량 운전석 뒤편에는 매트리스가 깔려 있다. 이름 모를 어느 도로 한 켠에서 새벽 쪽잠을 자기 위해서다. 화물기사들의 실질소득은 주장하는 쪽마다 널을 뛴다. 숫자를 믿을 수 없을 땐 이들의 삶을 보면 된다. 나는 그간 수많은 화물노동자의 사건을 맡았지만 그 누구도 부자 동네, 유명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대부분은 낮은 전세보증금과 화물차량이 가진 재산의 전부였다.
화물노동자는 고소득 노동자가 아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고용불안까지 시달리는 전형적인 ‘비정규직’ 특수고용 노동자다. 그러니 이들이 만든 노동조합, 화물연대는 귀족노조일 수 없다. 최저임금제를 요구하며 파업하는 ‘귀족’노조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은 약해서 뭉쳐서 싸우고, 돈과 권력이 없어 파업으로 저항한다. 힘이 있었다면 생계를 걸고 파업할 이유도 없다. 돈으로, 힘으로 진작에 안전운임제 그 이상의 제도가 입법화되었을 것이다. 파업할 필요도 없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자, ‘떼법’이 아닌 ‘입법’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 그런 자가 진짜 강자이고 귀족이다.
지난 여름에는 거제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농성했다. 현장을 찾은 노동부 장관은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 모두에게로 손해배상을 확대할 것을 요구했고, 대우조선은 이들에게 470억 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며 스스로를 철창에 가뒀던 노동자에게는 재산 강제집행 절차가 개시됐다. 정부는 이들 하청노동자도 말 그대로 힘으로 ‘제압’하고 있다.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는 누가 봐도 귀족과는 거리가 멀다. 강도 높은 조선소 노동 끝에 월 200만 원 남짓 버는 노동자를 ‘귀족’이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들도 진짜 사장인 대우조선과는 교섭도 못 하고 항의도 못하는 ‘비정규직’ 신세다. 교섭을 요구하며 집회를 했더니 구사대가 나타나 때려 부쉈다. 도저히 이대로 살 순 없었기에 농성을 택했다. 힘이 있었다면, 아니 최소한 정규직처럼 진짜 사장과 교섭만 할 수 있었어도 목숨 걸고 농성을 할 이유도 없다. 돈과 권력이 있었다면 비정규직이 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전에 위험하고 힘든 조선소 노동자가 될 필요도 없었다. 사장과 교섭할 필요가 없는 자, 애초 ‘노동자’가 될 필요도 없는 자가 진짜 강자이고 귀족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센 놈’이던 대통령 박근혜에 저항하며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유명세를 탔다. 문재인 정부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뒤 재벌과 강자들을 연이어 때려잡으며 인기를 드높였고, 정부의 실세이던 장관에 맞서며 공정과 정의의 기치를 들어 대통령까지 됐다. 그런 그가 지금은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약자인 비정규직들을 ‘강성귀족노조’로 명명하며 정말 처절하게 때려잡고 있다. 강자를 때려잡고 대통령이 된 자가 약자를 짓밟아 인기를 드높이려 한다니 참으로 역설이다.
기막힌 현실을 뉴스로 보고 싶지 않다. 센 놈을 때려잡는 드라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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