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새해맞이 작은 청소
새해 기분이다. 군자란과 정답게 눈도 맞추며 안 하던 일도 해 본다. 이때 아니면 언제 쥐구멍이 볕맛을 보랴. 대대적인 청소를 끝내고 뒤죽박죽이던 서랍도 정리한 뒤 안주머니를 뒤졌다. 빈약한 지갑의 속사정을 탈탈 턴 적이 언제였던가. 영화배우 조진웅은 자신의 예명이 부친 조진웅씨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연기하겠다는 특별한 각오를 ‘조진웅’에 담은 셈이다. 이름에 비할 바 아니지만 아버지의 유품 하나가 지갑 속에 있다. 모처럼 그 안부도 확인하고 싶었다.
지갑을 홀랑 뒤집었다. 몇 장의 지폐, 타인의 명함, 신용카드, 운전면허증, 교하도서관 회원증이 나왔다. 목록이 더 있다. 1 중학생 시절 반명함판 흑백사진. 2 봉바위 천진석가여래상 사진. 3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카드. 4 포스트잇. 5 경로우대증. 각각의 용도를 살펴본다. 1=한때나마 총기 있던 눈빛을 간직하려고. 2=설악산 첫 등산 갔을 때 봉정암에서 얻은 것. 뒷면에는 법구경의 한 구절.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지쳐 있는 나그네에게는 지척도 천 리, 바른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에게, 윤회의 발길은 아득하여라.” 3=그냥. 4=책갈피 대용. 5=선친이 돌아가신 뒤, 주민등록증은 동사무소에 반납하고 경로우대증은 내가 지녔다. 1993년 6월8일 발행된 증명서에서 보건사회부 장관은 이렇게 당부한다. “이 할아버지는 노인복지법 제10조에 규정한 경로우대 대상자이오니 정성껏 모시기 바랍니다.” 선친은 희미하게 여전히 웃고 계신다.
계묘년이 출발한다. 토끼는 앞발은 짧고 뒷발이 길다. 비탈에 적응한 것이다. 내 사는 참 삐딱한 이 운동장에서 올해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주섬주섬 지갑을 챙기는데 어느 뒷면에 붙어 있던 우표가 툭 떨어진다. 아, 맞다. 그 어딘가로 편지처럼 배달되고 싶은 마음에 언젠가 지갑 속에 넣어둔 우표 한 장. 영화 <패터슨>은 패터슨 시의 버스운전사인 패터슨씨가 일상 속에서 시를 써나가는 내용이다. 아내가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주는데, 그 통의 모양이 현관 앞 우체통을 빼닮았다. 패터슨은 도시락통을 열 때마다 낯선 곳에 도착한 기분으로 시를 쓰지 않았을까. 손에 잡힐 듯 서울 하늘에 떠 있는 건 우표 같은 구름.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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