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쓰고 달콤한 경제] 주주자본주의 과잉의 어떤 나라
미국 증시에서 시가총액이 가장 큰 애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초우량 기업이다. 작년 9월 말 기준 애플의 자기자본은 506억달러였다. 원화로 환산하면 63조원(원·달러 환율 1250원 가정)으로 삼성전자보다 자기자본 규모가 적다. 흥미로운 점은 애플의 자기자본이 계속 감소해왔다는 사실이다. 2017년 9월 말 애플의 자기자본은 1340억달러였다. 5년 동안 자기자본이 62%나 감소한 셈이다. 자기자본의 감소는 일반적으로 부실 기업들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업이 적자를 낼 때 자기자본이 줄어드는데, 초일류기업 애플은 이와 무관하다. 지난 5년 동안 애플이 벌어들인 순이익은 3666억달러로, 원화로 환산하면 458조원에 달한다. 같은 기간 동안 삼성전자가 벌어들인 이익의 3.1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애플의 자기자본 감소는 공격적인 주주환원의 산물이다. 애플은 지난 5년 동안 4585억달러를 자사주 매입과 배당을 통해 주주들에게 돌려줬다. 벌어들인 이익보다 더 많은 돈을 주주환원에 썼으니 자기자본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배당보다는 자사주 매입에 더 많은 돈을 썼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4585억달러의 주주환원 중 자사주 매입으로 쓴 금액이 3873억달러에 달했다. 배당은 주주들에게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을 쥐여주는 행위이고, 자사주 매입은 회삿돈으로 자사의 주식을 매입해 소각함으로써 기존 주주들의 지분율을 높여주는 행위이다. 배당은 일회적 성격을 가진다. 우량 기업들은 대체로 매년 배당을 실시하지만, 과거의 배당이 미래의 배당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반면 자사주 매입 후 소각을 통한 발행주식수 축소는 항구적으로 지속되는 현상이다. 자본은 자기증식의 속성이 있을진대, 초우량 기업 애플은 스스로 자본을 파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애플은 양반이다. 규모가 줄어들고 있지만, 그래도 자기자본이라는 회계적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 500개로 구성된 S&P500지수 구성종목들 중 29개는 아예 자기자본이 마이너스이다. 부채가 자산보다 많은 전액 자본잠식 상황인 것이다. 자본잠식인 회사는 상장 폐지를 앞두고 있는 부실기업인 경우가 많은데, 미국을 대표하는 상장사들이 이런 범주에 속할 리는 없다. 자기자본이 마이너스인 기업들의 면면을 보면, 스타벅스·오라클·맥도널드·휴렛 팩커드·도미노피자·홈디포 등이다. 모두 수익성이 높은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우량 기업들이다. 이들은 주주환원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자본 파괴에 애플보다 더 열정을 쏟고 있다. 애플은 곳간에 쌓아놓은 잉여자금을 통해 주주환원을 하고 있는 데 반해 자본잠식 기업들은 빚을 내가면서까지 주주들에게 돈을 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물적 표현물인 기업을 통해 증식을 꾀하는 시스템인데, 기업에 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기업의 자본 파괴는 역설적으로 이들의 비즈니스 모델이 출중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기업이 자본을 회사에 쌓아놓는 이유는 대규모의 투자가 필요하거나, 예기치 못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완충기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기자본을 줄이고 있는 미국의 우량 기업들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지 않은 비제조업 기업들이고, 일상적인 비즈니스에서의 현금흐름이 양호해 굳이 이익을 유보해 놓을 필요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편으로 기업의 자본 파괴는 위기를 돌파해 나가는 ‘자본주의의 변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본은 규모가 커지면 대체로 효율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자본이 쌓여 일정 임계치를 넘어서게 되면 추가적인 자본 투입에 따른 산출의 효율이 떨어진다.
자본스탁의 규모가 큰 선진국의 성장률이 신흥국보다 떨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인데, 주류 경제학에서는 이를 ‘한계생산 체감의 법칙’으로, 좌파 경제학에서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로 설명했다.
작년 이후 미국 주식시장은 조정세를 나타내고 있지만, 2021년까지의 미국 증시는 사상 유례없는 장기 강세장을 구가한 바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였던 2009년 3월부터 시작된 미국 증시의 강세장은 S&P500지수 기준 154개월이나 지속됐고, 상승률은 608%에 달했다. 상승 기간과 상승률 모두 미국 증시 150년 역사상 압도적인 1위이다. 주가는 이토록 많이 올랐지만 같은 기간 동안의 미국 GDP성장률은 연평균 1.6%에 불과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성장률이 가장 낮았던 저성장의 시대에 주가는 치솟았다.
미국의 초일류 기업들은 총량적인 성장 둔화의 시대에 자본을 파괴함으로써 자본의 효율성을 높였다. ROE(자기자본이익률)는 자본의 효율성을 보여주는 지표인데, 당기순이익을 자기자본으로 나눠서 산출된다. 이익이 늘어나거나, 자기자본을 줄이면 ROE가 상승한다. 전자는 오랫동안 봐온 익숙한 모습이고, 후자는 낯선 광경이다. 미국의 초우량 기업들은 이익도 많이 늘어났지만, 자본을 줄임으로써 자본효율성을 극단적으로 높였다.
주주자본주의로 포장된 우량 기업들의 자본파괴는 메인스트리트(실물경제)와 월스트리트(주식시장)의 괴리를 만들었다. 메인스트리트는 총량적인 성장을 반영하지만, 월스트리트는 자본의 효율을 반영한다. 미국처럼 주식 투자가 대중화된 국가에서도 주식투자 인구보다 주식투자를 하지 않는 이들의 숫자가 더 많다. 실물과 주가의 괴리가 커지면 불평등은 커진다. 온갖 정책이 뒤섞였던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방지법안(IRA)에 자사주 매입에 대한 규제가 들어간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 구성원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일은 총량적 성장이지, 자본 효율성이 아니다. 과거에는 성장의 파이를 키우는 일이 자본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이었지만, 최근 미국 자본주의는 자본을 줄임으로써 효율을 높였다.
자사주 매입에 1%의 과세를 하는 규제 법안이 아니더라도 미국의 극단적인 주주환원은 지속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금리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빚까지 내면서 자사주를 매입해 자본을 줄이는 행태는 초저금리하에서나 가능했다. 한국과 같은 주주자본주의 결핍의 나라에서 미국의 주주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일이 사치처럼 느껴지지만, 실물경제보다 훨씬 앞서서 달려온 미국 증시의 지난 10여년의 상승세는 지나친 면이 있었다고 본다. 미국 주식시장은 자본파괴를 통해 자본효율을 높이는 자본주의의 변종을 보여줬지만, 향후 수년간은 이에 대한 후유증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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