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소련 태평양함대 잠수함이 제주 4·3사건에 개입했다고?

유석재 기자 2023. 1. 1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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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섭 교수팀 ‘이승만 정부 초기 해군정책’ 연구에서 드러난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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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소련 해군이 운용했던 W급 잠수함,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이 열린 지 불과 이틀 뒤인 1948년 8월 17일, 제주도 근해에서 괴(怪)함정을 감시하던 대한민국 해안경비대 YMS-503(광주)호에 어떤 배가 충돌을 시도했습니다. 그것은 소련 해군 소속 함정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서 볼 수 있는 주한미군 공식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1948년 10월과 1949년 1월에는 같은 제주도 근해에서 잠수함이 지나가는 것이 탐지됐습니다. 소련 국적으로 추정되는 잠수함이었습니다. 소련 군함과 잠수함이 자꾸만 제주도에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보다 앞선 1947년 5월 31일, 울진 근해를 순찰하던 조선해안경비대 함정은 소련 국적으로 추정되는 잠수함을 발견하고 추적하던 중 이 잠수함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신생 대한민국은 바다로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북쪽으로부터는 소련 해군이 수시로 영해를 침투하고 있었고, 북한군 역시 해양을 통한 공격 가능성이 상존한 상황이었습니다. 서쪽에서는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공이 황해 제해권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럼 동쪽과 남쪽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본은 언제든 재무장 가능성이 있었고, 일본 어선은 수시로 한국 근해를 침범하고 있었습니다.

1945~1950년의 한반도 지도.

최근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박사과정 이호준씨와 함께 써서 ‘국제정치논총’ 제62집 4호에 발표한 논문 ‘6·25 이전 이승만정부의 해양위협인식과 해군정책, 1948-1950′을 읽어 보면, 삼면이 바다인 대한민국이 출범과 함께 얼마나 해양 세력의 강한 위협에 노출돼 있었는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입니다. 김명섭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살아 남은 게 다행”이라며 탄식했습니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고운호 기자

그 중에서도 특히 공포의 대상은 바다를 휘젓고 다니는 소련 잠수함이었습니다고 이 논문은 지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치닫을 무렵, 소련군은 발트해 연안의 독일 잠수함 건조 시설들을 접수해 10척 이상의 독일 U보트를 나포했습니다. 독일 잠수함 기술자들은 소련으로 데려갔습니다. 당시 독일은 장기간 잠항이 가능한 U-21형 스노켈(snokel·잠수호흡관)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볼프강 페터젠 감독의 1982년 영화 ‘특전 유보트(Das Boot)’에 나온 그 유보트 말입니다.

2차대전 당시 활약한 독일군의 잠수함 U보트.

그리고 독일군의 잠수함 기술을 흡수한 소련은 1940년대 후반부터 이 기술이 적용된 W급과 R급 잠수함을 다량으로 건조했습니다. 독일 기술 스노켈이 장착된 소련 잠수함은 미 해군의 대잠수함작전(Anti-Submarine Warare) 능력으로도 탐지와 추적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바로 이 잠수함들이 유럽이 아닌 태평양함대에 배치됐습니다. 태평양함대라면 블라디보스톡이고 그곳은 바로 38선 이남과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 아닌가? 그런데 중요한 것은 블라디보스톡뿐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훨씬 더 전진배치돼 있었습니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 스탈린은 요동(랴오둥)반도의 여순(뤼순)과 대련(다롄)을 점령했습니다. 1948년 12월 소련군은 38선 이북에서 철수했으나 여순과 대련의 지배는 계속됐습니다. 동해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서해의 요동반도까지 소련 함대의 앞마당이 됐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세 곳 더 추가됩니다.

1949년 2월 24일, 소련 내각회의는 이렇게 결정합니다.

①청진항에 해군 함정 61척(어뢰정 24척, 대형 어획선 7척, 소해정 6척, 초계정 6척, 보조함 7척, 수로연구용 선박 3척) 배치.

②원산항에 수로연구용 선박 2척 배치.

③나진항에 해군구조선 6척 배치.

이 세 곳에 총 3530명의 병력과 264명의 군무원을 주둔시킴.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스탈린과 만찬을 나누는 김일성;

청진·나진·원산 세 곳이 소련의 항구가 됐던 것입니다. 1949년 3월에 스탈린과 김일성은 이 세 항구를 30년 동안 조차하는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소련은 태평양함대에 잠수함 80여 척을 배치했습니다. 그 중 50척은 원양 작전이 가능한 1000톤급 이상의 함정이었습니다.

이제 동해와 남해는 소련 잠수함이 수시로 넘나드는 사실상의 영해처럼 됐습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 정부는, 대통령 이승만은 이것을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요?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0월 24일 자신의 정치고문인 미국인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과거에 내가 위험성을 지적했던) 러시아인들이 여기에 있다. 누가 그들을 물리칠 것인가? …한국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싸워 러시아인들을 북쪽에서 쫓아버리기를 원하고 있다. …만약 러시아인들이 쳐들어온다면, 그것은 축차공격(piecemeal attack)이 아니라 전면공격(all-out attack)이 될 것이다. …예정되는 러시아인들의 다음 행동은 그저 시간표를 들여다보면서 예정대로 계속 진행해나가는 일뿐이다.”

강도 높은 우려와 공포가 문장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국민당 군대가 결정적으로 밀린 뒤인 1948년 12월 19일에 이승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공산주의는 마치 불붙는 삼림과 같이 사면으로 전파돼… 이 불빛이 도달치 않은 곳은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과연 이것이 지나친 기우였을까요? 그것은 그 몇 년 뒤에 전개된 불행한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이 동부전선을 시찰하는 도중 강원도의 한 부대에서 지프차 위에 선 채 장병들을 격려하는 즉석 연설을 하고 있다. /기파랑

자, 그런데.

도대체 청진·나진·원산항을 장악한 소련군은 잠수함 80여 척을 가지고 무슨 활동을 했던 걸까요? 왜 한반도 근해에 그렇게 여러 차례 출몰했던 것일까요?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제주도에?

(소련 잠수함의 한반도 근해 출몰 자체를 가짜뉴스로 보려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만, 소련 잠수함 80여척의 존재 자체를 가짜정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 동안 거의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자료 하나를 김명섭 교수팀은 논문에서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제2회 국회 정기회의 속기록’의 1949년 3월 21일자에 기록된 ‘내무부 장관의 제주도 시찰보고’라는 문서였습니다. 내무장관에서 국방장관으로 이임한 신성모(1891~1960)는 국회에서 이렇게 보고했던 것입니다.

“소련 잠수함과 함정의 출현은 제주도와 여수·순천 등지에서 준동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신성모 장관은 그 근거로 세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①소련 잠수함과 함정이 빈번하게 발견되고 있는 곳은 제주도 근해다.

②제주도의 반란분자들이 공산주의 게릴라 전술에 따라 강고한 조직력을 구축했다.

③이들이 소지한 무기의 상당 부분이 소련제 무기였다.

제주 4.3 사건이 진행되던 1948년 6월 제주도의 수용자들이 심문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이 대목을 읽고 나서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 4·3과 여순 사건 연구자들은 지금까지 ‘소련 잠수함 80여 척’의 존재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제주도에서 사용된 소련제 무기들은 어떤 경로로 유입됐을까?(우리는 종종, 4.3 사건 당시 수많은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비극적으로 희생됐다는 사실에 가린, 진짜 ‘반란군’인 남로당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합니다)

―만약 소련 잠수함과 4·3 및 여순 사건이 서로 별 관련이 없는 것이라면, 스탈린의 입장에선 기껏 제주도 근처까지 가서 그냥 돌아온 잠수함 탑승자들에게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을까?

이것은 정황만 있을 뿐, 물증이 발견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의 입장에선 ‘실제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생각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소련 잠수함을 방어할 수 있는 해군력을 키우는 것이 절실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한국의 경제력은 대단히 열악했기 때문에, 미국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는 수밖엔 없었던 것입니다.

이승만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끈질기게 ‘서태평양의 평화를 위한 한국 해군 증강’을 요청했고, 진해 해군기지를 ‘아시아의 노르망디’라고 선전하며 미국 해군에 사용권을 제공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습니다. 청진·나진·원산의 소련 해군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낮게 봤던 미국은 한국 해군이 34척 정도의 함정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지원에 그쳤습니다.

1951년 6·25 전쟁 발발 1주년을 맞아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한 이승만(왼쪽에서 둘째) 대통령이 손원일 해군참모총장과 함께 생도들을 사열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그러자 이승만 정부는 해군 증강에 필수적인 함정 확보에 나섰습니다. 한국 정부가 주목한 것은 일본 요코스카항에 체류 중인 27척의 호위 초계함이었습니다. 미국이 2차대전 중 소련에 대여했다 돌려받은 것으로, 잉여물자로 분류돼 있던 것이었죠. 그러나 미국은 이 배들을 한국에 파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배를 사기 위해 직접 미국으로 간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미 해양대학교에 1만8000달러를 지불하고 ‘화이트헤드 소위함’을 구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백두산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코스카항의 초계함 구매가 좌절되자 손원일은 백두산함과 동급인 PC급 구잠함(驅潛艦) 세 척을 추가로 구입했습니다. 이때가 1949년 11월, 6·25 발발 불과 7개월 전이었습니다.

구잠함이 뭘까요. 바로 적 잠수함을 침몰시키는 것이 주 임무인 배입니다. 당시 한국 정부가 소련 잠수함을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돈으로?

대한민국 해군의 첫 전투함인 백두산함. 1949년 미국에서 사들인 잠수함 대비 구잠함이었다.

항간에는 ‘백두산함은 국민 모금으로 구입한 배’라고 알려져 있지만, 손원일이 출국할 때 들고 간 모금액은 852만원에 그쳤다고 합니다. 결국 배 구입비의 대부분은 미국의 군사원조 자금의 일부를 해군 쪽으로 돌려 충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이승만 정부의 끈질긴 노력은 결실을 맺었는데, 1950년 1월 트루먼 대통령과 미국 의회는 1950년 1월 백두산함을 비롯한 4척의 PC급 구잠함 무장과 관련한 군사원조 자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승인했습니다. 한국 해군이 창설 이래 처음으로 보유하게 된 전투함이었습니다.

국방부를 ‘육군부’와 ‘해군부’로 분리시키려는 방안을 포함한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해군 정책은, 미국의 비협조와 육군의 견제, 재정적인 한계, 전쟁 조기 발발 등으로 인해 소기의 성과를 충분히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구입한 백두산함은 1950년 6·25 전쟁 발발 당일 일어난 대한해협해전에서 특수부대원 600명을 싣고 부산으로 침투하던 북한 함정을 격침시키는 중요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이승만이 해군을 육성하려 했던 이유를 담은 1949년 8월 21일의 발언이 있습니다. 인천에서 거행된 관함식에서 했던 연설입니다.

“남의 나라를 침손(侵損)하거나 남의 강토를 점령하자는 생각은 소호(小毫)만큼도 없지만, 남이 우리를 무시하고 침해한다면 우리는 우리 강토와 우리 해면 안에서는 그런 나라들과 화평으로 지낼 수 없다는 결심을 세계에 표명할 수 있는 해군을 건설해야 한다.”

2022년 12월 20일, 110일 간의 순항훈련을 마치고 진해군항으로 복귀한 2022 대한민국해군 순항훈련전단 소속 장병과 해군사관생도들이 복귀신고를 하고 있다. /해군 작전사

현재 대한민국 해군은 병력 약 7만명에, 잠수함 20여 척, 수상함정 180여 척, 항공기 70여 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나·당 전쟁의 기벌포 해전으로부터 결정적일 때마다 나라를 구해냈으나 부당하게 잊혔던 해군의 역사를 언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4/23/2010042301683.html) 이 글 마지막에서 이렇게 썼죠. ‘해군은 홀대받고 망각되기를 반복하면서도 푸른 포말 속에 이름을 묻은 채 언제나 묵묵히 조국을 수호해 왔던 것이다.’ 사족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육군 을지부대에서 병장으로 제대했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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