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엽의고전나들이] 맑음과 탁함, 두터움과 얇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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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본래 기도문이었다.
죽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이 울릴 때, 굳이 어떤 인간의 죽음인가 알려 하지 말라는 인류애적 사랑을 담고 있다.
이렇게 누구의 죽음이든 나의 삶과 연관된다고 여겨야 한다면, 나와 친하거나 특별히 선하거나 아름다운 이의 죽음이야 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독 먼저 가는 이들은 나와 친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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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임금도 사람의 목숨이 무슨 까닭으로 장수하기도 하고 요절하기도 하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에 대해 물었고, 율곡은 그에 답했다. ‘수요책’(壽夭策)이 바로 그 답안인데, 선조의 궁금증을 단적으로 표현해보면 이렇다. “왜 천하의 어진 선비인 안연은 요절하고, 천하의 악한 도적인 도척은 장수했는가?”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만일 운명이 미리 정해진 것이라면 바르게 사는 게 의미가 없을 것이고, 바르게 사는 게 의미가 있다면 그런 부조리한 엇갈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답답함일 것이다.
책문(策文)은 임금이 낸 시의성 있는 현안 등에 관한 물음인 책문(策問)에 답하는 글이어서, 요즘 말로 하면 논문의 영역이다. 그만큼 간명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 당대 최고의 천재 율곡 선생이 가지고 나온 해법은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이다. 세상만사를 기(氣)가 뭉치고 흩어지는 것으로 풀어내는 논지에서, 기에는 맑음과 탁함도 있고 두터움과 얇음도 있다는 것이다. 기가 맑은 사람은 착할 것이고 기가 탁한 사람은 악할 것이다. 그러나 기가 맑다고 기가 두터운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기가 얇은 사람이 착한 것도 아니다.
이 논리대로 한다면, 안연은 기가 맑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선했지만 기가 얇은 탓에 일찍 죽었다. 도척은 기가 탁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악했지만 기가 두터운 탓에 오래 살았다. 물론 타고난 기가 얇더라도 잘 건사하고 키워나가서 어느 정도 두텁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두터운 기를 타고났어도 멋대로 쓰다 소진하면 얇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착하면 당연히 강하고, 또 강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은 비현실적이다. 나는 선한데 왜 악한 상대를 이길 수 없는가라는 질문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혼잣말이기 쉽다. 선하기도 어렵지만 선하면서 강하기는 더욱 어렵고, 더구나 상대가 강한 데다 부지런하기까지 하다면 끔찍하다.
이강엽 대구교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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