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만 듣고도… AI가 치매·우울증·천식 진단한다
[Cover Story] 디지털 헬스시장 年 4000억달러로 성장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사는 한 12살 소녀는 평소 손목에 스마트워치를 착용했다. 지난해 어느 날 갑자기 시계에 경고음이 울렸다. 심박수가 비정상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소녀의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고, 맹장염이라는 진단에 수술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수술실에 들어간 의사들이 발견한 것은 맹장에서 자라고 있던 악성 종양이었다. 청소년은 잘 걸리지 않는 희소암인 충수암이었다. 즉각 암 제거 수술을 받고 건강을 되찾은 소녀의 어머니는 “스마트워치의 경고가 없었다면 딸을 병원에 데려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이고, 그랬다면 내 딸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와 정보통신기술(ICT)을 융합해 개인의 건강과 질병을 관리하는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목소리만 듣고도 치매 증상이 있는지 AI(인공지능)가 미리 파악하는가 하면, 몸에 손을 대지 않고 빛을 쏘아 암 여부를 판단하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다. 약물이나 수술 대신 모바일 앱이나 웨어러블, 가상현실(VR) 등 디지털 기기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디지털 치료제(DTX) 연구도 활발하다. 디지털 헬스케어는 세상을 어떻게 바꿔나가고 있을까.
◇목소리·기침 듣고 “우울증이군요!”
기술 개발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는 분야는 병이 있거나 발생 가능성이 있는지 조기에 파악해내는 진단 분야다. 유전체 전문 기업인 마크로젠 김창훈 대표는 “디지털 헬스케어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의료 비용을 줄이는 것”이라며 “질병 치료 비용이 예방 비용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미리 병을 진단하는 기술에 대한 투자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중에서도 최근에는 음성을 활용한 진단 기술이 각광받고 있다. 스마트폰이나 AI 스피커, 무선 이어폰 등 음성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장비가 널리 보급되고,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진료가 늘어난 데 힘입었다. 환자의 음성이나 호흡, 기침 패턴을 AI가 듣고 우울증이나 치매, 파킨슨병 등에 걸렸는지를 판단해낸다.
미국의 ‘손드 헬스’(Sonde Health)는 음성의 강약, 높낮이, 성대 움직임 등을 분석해 몸 상태를 파악하고, 이를 분석해 병이 있는지를 판별해내는 AI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를 위해 유럽과 미주 등 4개 대륙에 사는 8만5000여 명으로부터 120만개 음성 샘플을 모았다. 현재 이 기술은 우울증과 호흡기 분야 병 진단에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6초짜리 사람의 목소리만 입력하면 천식에 걸렸는지를 판단해낸다. 30초짜리 음성을 AI에 입력하면 우울증 여부도 알아낼 수 있다는 게 이 업체의 설명이다. 현재 덴마크의 헬스 관련 기업 등이 개발한 앱에 이 기술이 적용되고 있다. 이 업체는 나아가 치매, 알코올중독 여부도 사람의 목소리로 파악해내는 기술도 개발 중이다. 이 기술이 각광받자 KT도 지난해 이 업체에 200만달러(약 25억원)를 투자했다. 임승혁 KT 디지털·바이오헬스사업단장은 “콜센터 직원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이 기술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며 “향후 인공지능 스피커로 각종 질병 유무를 모니터링하는 데도 접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미국 스타트업 ‘킨츠기’(Kintsugi)가 개발한 앱도 목소리만으로 사용자가 얼마나 우울하고 불안한지 AI가 판단한다. 사용자가 정기적으로 자신의 감정에 대해 말하면 ‘0~21′단계로 우울증 정도를 판단하는 방식이다. 누군가가 20초만 말해도 우울증이나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80% 정확도로 알아낼 수 있다는 게 이 업체의 설명이다. 그레이스 창 킨츠기 CEO는 “앱 이용자들의 기록을 계속 저장하고 추적하기 때문에 환자가 즉흥적으로 꺼낸 이야기를 바탕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빛으로 유방암 파악, 거울이 화장품 추천
암 발병 여부를 조기 진단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도 국내외 기업들이 뛰어들었다. 국내 스타트업 ‘올리브헬스케어’는 가슴 내 피부에 근적외선을 쏘아 유방암을 확인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빛이 몸에 흡수된 후 반사하면, 이를 AI가 분석해 몸속 혈액 내 헤모글로빈 농도를 파악한다. 암세포가 있으면 혈액 내 헤모글로빈 수치가 올라가기 때문에 AI는 유방암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한다. 현재 1차 임상 시험을 마쳤고, 올해 안에 2차 임상시험을 진행해 2024년부터 상용화한다는 게 이 업체의 목표다. 올리브헬스케어 한성호 대표는 “암은 판단하는 의사의 역량에 따라 큰 차이가 나고, 초음파로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보니 환자들도 불안해한다”며 “디지털 기술이 발전해 적용될 수 있는 대표적인 분야”라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혈액 몇 방울로 암 발생 위험을 예측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일본의 헬스케어 기업 ‘NEC 설루션 이노베이터’ 등이 개발 중인 이 기술은 혈액에서 수천종의 단백질을 포착하고 그 양을 조사한 뒤 암에 걸릴 가능성이 있는지를 AI가 판단해 낸다. 수년 안에 유방과 대장, 전립선 등 6종의 암을 판단해내는 서비스를 내놓겠다는 목표를 세워 놓고 있다.
사람의 얼굴을 비추면 피부 상태 등을 파악해내는 거울(스마트 미러)은 이미 개발돼 시중에 팔리고 있다. 국내 업체 ‘룰루랩’이 개발한 이 거울은 사용자가 손을 대면 사진을 찍어 AI로 분석한다. 모공, 주름, 트러블, 색소 침착, 다크 서클, 붉은끼 등 여섯 항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피부 점수를 매긴 뒤 화장품이나 케어 방법 등을 추천해준다. 예를 들어 지성 피부면 에센스를 바르지 말 것을 권유하고, 주름 항목 점수가 떨어지면 안티 에이징 성분이 많이 함유된 화장품을 추천하는 식이다. 룰루랩 관계자는 “200만건 이상의 피부 데이터를 바탕으로 개발해 작년 6월부터 시중에 판매하고 있다”고 말했다.
◇몸 속 스마트 알약, “장 건강 안좋아요”
진단을 넘어 질병 치료를 위한 ‘디지털 치료제(DTX)’도 활발히 개발되고 있다. 몸에 칼을 대는 수술이나 전통적인 약물 대신 ‘스마트 알약(smart pill)’이나 웨어러블 기기, 가상현실(VR) 등의 기술을 통해 병을 치료하는 방식이다.
미국 샌디에이고 대학 연구진은 뱃속에 들어가 내장 건강 등을 확인하는 ‘스마트 알약’을 개발하고 있다. 알약은 길이 2.6cm, 지름 0.9cm 크기에 무선 바이오센서가 달려 있다. 지난해 돼지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5초 간격으로 약 2~5시간 동안 포도당 수치를 측정하는 데 성공했다. 화학 전지 대신 소화관을 통과할 때 포도당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생체연료전지(BFC)’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별도의 배터리는 필요 없다. ‘샌디에이고 유니온 트리뷴’은 “이 기술은 향후 대장 질환과 당뇨병 등 각종 위장 질환을 발견하고 치료하는데 쓰일 수 있다”고 전했다.
운동선수 등이 자신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가장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도 스마트알약이 쓰인다. 프랑스 ‘보디캡’(BodyCap)이 만든 스마트 알약은 몸속으로 들어가 심장이나 위장 같은 신체 내 장기 온도를 측정해 낸다. 겉으로는 체온이 정상이더라도,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질병에 걸리면 장기 온도가 낮을 수 있기 때문에 스마트 알약을 복용하면 정확한 몸 상태를 확인하고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와 함께 ‘전자약’(electroceuticals)은 비교적 오래전부터 개발돼 우울증이나 치매, 암, 당뇨병, 안구건조증 등을 치료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전자약이란 약물이나 주사 같은 화학·생물 약제가 아니라 전기·초음파·자기 등 전기신호로 병을 치료하는 제품을 뜻한다. 국내 기업 ‘와이브레인’은 머리 밴드에 전기자극을 줘 우울증을 치료하는 제품을 개발했다. 2021년 4월에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시판 허가를 받았고, 작년 6월부터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제품은 정신과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이용할 수 있다. 현재까지 이 제품에 대한 처방은 70여 병원에서 약 2만4000건 내려졌다. 와이브레인 관계자는 “환자가 이 제품으로 치료를 하면 30분 뒤 전류의 강도, 자극 시간, 빈도 등의 정보가 의사에게 전달된다”고 말했다.
통증을 완화하는 디지털치료제도 개발되고 있다. 미국 스타트업 ‘카이아헬스’가 개발한 MSK 설루션은 근골격계 통증을 완화하는 기능을 한다, 환자의 운동 성과를 측정해 맞춤형 운동과 물리치료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임상치료에서 이 프로그램에에 따라 운동하고 치료받은 환자의 의료비 청구액은 일반 표준 치료를 받는 환자들보다 80% 낮았다.
◇‘디지털 심장’으로 시뮬레이션
진단이나 치료 외에 개인의 맞춤형 건강 관리와 관련된 ‘웰니스(wellness)’ 분야도 떠오르고 있다. 이 분야는 스마트워치 등 웨어러블 장치와 맞물려 있다. 스마트워치를 통해 개인의 심박수나 심전도, 혈압 등을 파악하면 디지털 기기가 개인의 생활 방식이나 몸 상태 등을 파악해 영양·운동·수면·휴식 시간 등을 정해주는 식으로 작동한다. 국내 생명보험 업체 ‘신한라이프’의 경우 애플워치를 이용해 사용자의 건강 습관을 개선하도록 하는 앱을 출시했다. 앱에서 구매한 애플워치를 이용하면 최대 산소 섭취량과 체중을 기준으로 체력 상태를 파악하고, ‘주 3회 500칼로리(Kcal)를 소모하세요’와 같은 활동 목표를 제안한다. 신한라이프 관계자는 “고객이 건강해지면 고객도, 보험회사도 좋다”며 “전 세계 보험산업이 갈수록 어렵다 보니 국내외 생명보험사들이 앞다퉈 헬스케어 영역으로 진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메타버스 등 가상세계를 의료와 접목시키려는 연구도 활발하다. 대표적인 것이 실제 세계를 디지털로 복제하는 ‘디지털 트윈’ 기술이다. 프랑스 3D 소프트 업체 ‘다쏘시스템’은 3D 복제 기술로 인간의 장기와 세포 등을 디지털상에서 똑같이 설계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예를 들어 ‘리빙하트(Living Heart)’는 고성능 3D 시뮬레이터로 인간의 심장을 고스란히 가상 세계에 구현해낸다. 전기나 혈액 흐름 등에 반응하도록 돼 있어 장기 일부를 자르거나 약물을 투입했을 때 어떤 반응이나 결과가 나오는지 파악할 수 있다. 현재 하버드 의대 등 미국 대형 병원과 의사들이 실제 수술 전 모의 수술 할 때 이 기술을 이용한다. 이 업체는 사람의 뇌를 가상 세계에 구현하는 기술도 개발 중이다. 트라우마·뇌종양·알츠하이머·간질·뇌졸중 같은 뇌 질환의 발생 기전을 파악하거나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이 업체는 기대하고 있다.
◇규제 장벽에... 한국은 걸음마 단계
의료 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는 데다 의료 소외 계층의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디지털 헬스케어는 미국·유럽 등을 중심으로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등에 업고 급성장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GIA에 따르면, 전 세계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의 41%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은 연평균 19.3%씩 성장해 2020년 626억달러(약 78조원)인 시장 규모가 2027년 2156억달러(약 268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유럽도 417억달러인 시장 규모가 연평균 16.1% 커져 1185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보고서에서 “미국은 디지털 헬스케어 선두 주자라는 위치에 걸맞게 빅데이터 구축과 규제 개혁을 중심으로 다양한 의료 혁신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고, 유럽도 세계적인 추세에 발맞춰 보건의료와 ICT를 융합한 디지털 헬스케어 활성화 정책을 적극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반면 한국은 2018년 기준 전 세계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에서 비율이 0.7%에 불과할 만큼 변방에 머물러 있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 중국에서도 보편화 단계에 접어든 원격진료 역시 한국에선 아직 불법으로 남아 있다. 정부가 “디지털 헬스케어를 신산업으로 육성하겠다”고 공언한 지 오래됐지만, 이해관계자들 간의 이견을 좁히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관련 규제 개혁에 속도를 못 내고 있다. 김현수 올리브헬스케어 상무는 “미국은 아마존, 텔리닥, 암웰 등 기업들이 원격의료와 관련한 시스템을 속속 개발하고 있고, 국내 기업들도 삼성과 SK 등이 뛰어들고 있지만 선진국에 비해 규제를 해제하는 속도가 느리다 보니 기업들이 해외시장에서 기회를 찾고 있는 상황”이라며 “우리나라가 특히 고령화 속도가 빠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불필요한 규제를 더 과감히 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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