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미, 손명원... 실향민 109명이 1000쪽에 풀어놓은 ‘분단의 아픔’
1948년 평양에 살던 열 살 소년 박도순의 집에 한밤중 소련군이 들이닥쳐 그의 큰형을 잡아갔다. 당시 기독교·보수 인사들이 다수 포진된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서 활동하던 큰형은 김일성 세력과 소련군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평양에 머물던 가족들은 1950년 12월 피란 열차에 올랐다. 발 디딜 틈 없이 피란민으로 들어찬 지붕에서 일부는 떨어져 죽기도 했다. 제대로 먹지 못한 어린아이가 엄마 등에 업힌 채 굶어 죽기도 했다. 박도순(85) 전 평양시민회장이 겪은 분단과 6·25 당시 모습이다. 이 증언을 비롯해 실향민 109명의 증언이 담긴 책이 나왔다. 이북5도위원회 평안남도 평남중앙도민회의 후원으로 평안남도 제21대 명예군수단에서 발간한 ‘두고 온 고향 남기고 싶은 이야기’다. 실향민 93명의 인터뷰와 16명의 회고록 등 총 1064페이지 분량이 두 권으로 나뉘어 발간됐다.
6·25전쟁을 군사·정치 등 거대 담론으로 분석한 책은 많지만, 100명 넘는 실향민의 목소리를 담은 증언록은 드문 일이다. 실향민들의 자발적 모금으로 발간 비용을 마련했다. 지난해 내내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 청사에서 인터뷰가 진행됐고, 지방 거주자를 위해 출장 인터뷰도 했다.
109명의 필진 중에는 각 분야 명사들도 있는데, 잘 알려지지 않았던 비화들도 들려줬다. 천주교계 원로 윤공희(99) 대주교는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이 대반격에 나서면서 평양 교구가 일시적으로 회복됐던 순간을 회고했다. 1950년 11월 20일 평양 관후리 성당을 찾았고, 평양의 교인들과 감격스러운 재회를 했다. 월남 전까지 다녔던 고향 진남포 성당도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둘러봤고, 평양 한 성당의 주임신부로 발령 났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전세가 뒤바뀌면서 평양을 떠나야 했다.
가수 현미(85)도 목숨 걸고 월남하던 기억을 털어놨다. 1950년 12월 평양을 떠나 다리가 끊긴 대동강을 배로 건넌 뒤 정처 없이 걸었다. “어린 동생들은 부모가 업었고, 오빠는 쌀을 지고, 나는 냄비를 지고 걸었다”고 했다. 연천 고랑포 부근에서 잠복해있던 인민군 패잔병들에게 붙잡혔다. 단발의 여성이었던 패잔병 우두머리는 “동무들은 지금 가봐야 대포밥밖에 안 된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라”고 협박했다. 그때 하늘에서 비행기 굉음이 들려오자 놀란 인민군들이 달아났다. 임진강에 다다른 가족은 밤이 돼 강물이 얼어붙을 때를 기다려 노끈으로 서로를 묶은 뒤 강을 건너가 비로소 대구에 정착했다.
평양고보를 졸업한 강인덕(91) 전 통일부 장관도 해방 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들려줬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고, 소련군이 8월 25일 평양을 점령했으니 북한 동포들이 자유를 맛본 건 딱 열흘”이라며 “시베리아 형무소에 있던 죄수들이 주축이었던 평양 진주 소련군은 집집마다 다니며 물건을 뺏고 부녀자를 겁탈했다”고 했다. 변변한 전화도 없던 상황에서 주민들은 새끼줄로 이 집과 저 집을 연결하고 깡통을 매달았다. 소련군이 나타나면 줄을 흔들어서 이웃끼리 ‘경계경보’를 전달해준 것이다.
평안남도 출신 할아버지(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와 아버지(손원일 전 국방장관)를 둔 손명원(82) 전 현대미포조선 사장은 아홉 살 때 발발한 6·25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급박한 상황에서 부모의 모습을 회고했다.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아버지의 사무실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이 몸을 삼가 바치나이다’라는 붓글씨 액자가 걸려있었고, 어머니는 자신에게 물을 떠오게 한 뒤 직접 부상병들의 얼굴과 손을 닦아줬다
이번 증언록 발간을 총괄한 이명우(76) 전 평안남도 지사는 “인터뷰에 응하신 어르신들은 낯선 남한 땅에서 이북 출신다운 강인한 정신력으로 굳건하게 뿌리 내리며 젊은 세대의 귀감이 됐다”며 “그러나 두고 온 고향과 가족과의 이별 순간을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서글프게 흐느끼셨다”고 말했다. 인터뷰 참여자 중 김건철 전 평남장학회장은 출간을 보지 못하고 지난해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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