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가로막는 금기와 선입견을 깨야 ‘통하는 과학 서사’ 나온다[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

기자 2023. 1. 12.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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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통하는 과학 콘텐츠와 문화-2
우리의 ‘편견’을 넘는 과학 서사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다른 것을 인정하기보다 우리만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편견…자유로운 사고를 가리고 훌륭한 과학 서사가 나올 수 있는 길을 막아
인류의 기원을 묻는 주제의식, 선입견을 깨부수는 인물들, 금기를 벗어나려는 과감함…특수 효과 기술력 따위보다 훨씬 중요

지난 회에 시작한 “세계에서도 통하는 과학 서사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마무리 강연을 올린다.

여러분, 과학은 우리가 가보지 못한 먼 우주에서도 작동하는 사고체계를 지향하므로 과학이 자리 잡은 문화는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끊임없이 밀어내려고 합니다. 테슬라의 머스크와 아마존의 베이조스가 우주로 나아가려고 하는 이유가 그것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한국의 대표적인 신기업 K사, N사에서 우주에 가려고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우주가 아니라 오히려 좁디 좁은 골목으로만 열심히 들어가지 않던가요. (청중 웃음)

‘미국 기업은 우주로, 한국 기업은 골목으로’, 선진국 따라하기 바빴던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가 낳은 현상 같습니다. 빠른 경제 발전을 이룰 순 있었지만, 세계에서 통하는 과학 서사를 만드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골목 상권을 무대로 하는 한 한국형 SF 걸작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요. (청중 웃음)

이러한 문화적 관성을 깨고 세계에서 통하는 과학 서사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저명한 해외 작품들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과학 서사의 소재 <배틀스타 갤럭티카>

배틀스타 갤럭티카. 줄여서 BSG라고 부르는데, 로봇과 우주를 소재로 한 이 드라마가 TV의 천국이라는 미국 타임지의 “사상 최고 TV 100선”으로 선정되었습니다. SF 한정이 아니라 전체 가운데입니다. 그럴 수 있던 원동력은, 수십억명의 인류가 인공지능(AI) 로봇인 ‘사일런’들에게 기습당한 뒤 겨우 8만명이 살아남아 생존과 구원 사이를 오가는 사투를 하는 과정에서 ‘인간이라면 정말로 겪을 만한 고민, 정말로 물을 만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편으론 인간을 사냥하면서도, 한편으론 인간을 부러워하며 인간처럼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사일런의 모습 속에서 흐려지는 인간과 로봇의 경계선을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인류를 절멸시키는 데 실패한 사일런의 우두머리가 ‘나는 우주를 가득 채운 감마선을 보고 싶은데 나의 창조자는 왜 전자기파의 극히 일부분만 볼 수 있는 나약한 눈을 주었는가’라며 자신의 태생을 한탄하는 모습만큼 인간적인 것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눈은 전자기파 가운데 일부의 영역인 가시광선만 볼 수 있다’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을 만한 상식 아닌가요? 그런 상식적인 문장 하나를 거작 과학 서사 속의 제일 대표적인 대사로 만들어버리는 일, 남 따라하기가 아닌 인간 존재의 본질을 묻는 과학적 태도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과학 서사의 영웅 <듄>

미국 기자 프랭크 허버트(1920~1986)는 오리건주에 취재하러 갔다가 모래언덕을 보고 느낀 경이로움을 소설로 남기기로 합니다. 이렇게 탄생한 <듄>은 사막에서의 삶에 대한 정교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입니다. 하지만 이 서사의 핵심은 그보다는 사막이라는 환경에서 생존해가는 주인공 폴의 반전 가득한 운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폴은 우주 최고의 명문가 어트레이디즈 가문의 외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집안이 살기 어려운 척박한 사막의 행성으로 이주를 하면서 그의 운명은 모래폭풍이 부는 사막처럼 한치 앞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왜 모자람이 없는 명문가 출신이 그러한 곳에 가는가?’를 묻고 영웅의 탄생과 비극을 통해 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이 이 서사입니다.

세계 최고 명문가의 외아들이라면 2023년 한국에서는 ‘괴팍한 성질과 부족함 없는 삶을 사는 금수저’라고 비꼬는 것이 유행이겠지만, 폴은 그렇게 살기는커녕 사막으로 가라는 우주 황제의 명령을 따르는 명예와 충성심 가득한 아버지가 황제의 계략에 피살되자 동생을 가진 어머니를 모시고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땅에 내몰리게 됩니다. 그곳에서 겨우 살아남아 맨바닥에서 다시 시작한 뒤 황제와 우주의 운명을 놓고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반전(反轉) 영웅의 이야기는 인물에 대한 우리의 뻔한 선입견을 벗어나 눈물과 탄식을 자아내고, 역사상 최고의 과학서라고 불리게 되는 원동력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 과학이라면, 과학을 가로막는 적은 바로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편견은 우리 마음의 눈을 가리고 훌륭한 과학 서사가 나올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립니다. 한 가지 예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금기의 벽을 넘어야 통한다 <공기인형>

이 강연을 준비하면서 과학 서사에 있어 편견의 악영향에 대해 고민하는데 우연하게도 <공기인형>이라는 2009년도 영화를 보았습니다. 주인공은 한국배우 배두나씨가 맡았고, 2010년에 처음 개봉한 뒤 2020년에 재개봉까지 했으니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알고 나면, 정작 한국에서는 나올 수 없었을 일본 영화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걸까요?

바람을 불어넣으면 사람 모양이 되는 성인 장난감 공기인형 속에서 어느날 마음이 피기 시작합니다. 겉모습도 사람 같아지면서 일도 하고, 친구도 만듭니다. 여기까지 한 편의 편안한 봄날 동화를 보는 기분에(또한 배두나씨와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가 ‘배두나씨는 정말 인형처럼 생겼다’라는 말을 해준 기억이 나서 더더욱) 내내 미소를 짓고 있던 저는 한순간에 반전의 충격에 빠졌습니다. 사람 같은 모습과 마음이 되어가곤 있었지만 타인의 섹스 도구라는 태생적 본능을 의심 없이 성실히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물로서의 태생적 본성과 자존감 있는 주체로서의 인간성이 끝내 화해하지 못함으로써 자신도, 연인도 모두 폐기물이 되어 버려지는 운명에 저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초현실적 발상, 반전의 주인공. 좋은 과학 서사의 핵심 요소를 갖췄고, 한국 배우가 나오며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나올 수 없을 작품. 공기인형 같은 물건을 자유로이 소유할 수 있느냐라는 기본 문제로 대립하는 곳에서 그를 소재로 한 고차원의 서사를 기대하긴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인기리에 재개봉까지 한 걸 보며 곧 가능하리란 희망을 가져봅니다.

지금의 우리를 뛰어넘어야 한다 <승리호>의 교훈

큰 규모의 깊은 주제의식, 금기와 선입견을 벗어난 소재와 반전의 인물들. 한국의 과학 서사는 어디까지 왔을까요? 한국의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자칭한 2021년 최근작 <승리호>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배우들의 연기와 특수효과 등 긍정적인 면이 있었지만, 과학의 의미가 살아있는 진정한 과학 서사라고 하기엔 갈 길이 아직 멀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승리호가 이야기의 핵심적 소재인 빈부격차를 다루는 방식이 온전히 2021년 한국인의 감성 그대로이기 때문에 굳이 우주를 배경으로 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게다가 부자들이 ‘잘못했다. 미안했다’며 일시적으로 돈을 내는 방식으로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반복적으로 증명해주었는데도 미래의 인류도 똑같은 환상에 빠져있도록 그려낸 것은 아직 과학 서사에 어울리는 장대한 주제의식이 다뤄질 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물론 진일보한 특수효과를 보았을 때 언젠가는 미래라는 시간, 우주라는 공간의 의의를 충분히 살린 서사가 우리에게서도 나오리라는 희망을 가져봄직하다며 감상을 마무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승리호> 관객이 놓쳤을 듯한 맨 마지막 대사가 제 귀에 들어오는 찰나 아, 그 희망의 실현은 조금 더 긴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승리호>에서 ‘타이거 박’(진선규 분)이라는 선원을 기억하실 겁니다. 험악한 외모에 무기를 쉽게 휘두르는 것으로 보아 거친 인생을 살아왔을 것 같지만, 쫓기던 가엾은 아이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인물로서 좋은 서사의 필수요소, 최대의 ‘반전’을 보여준 주요 인물이었지요. 그런데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아이들이 무서워한다며 문신도 지웠다’라는, 영화 속의 어떠한 서사와 상관없는 소리를 미담이라며 뜬금없이 던져버리고 끝나면서 중요한 반전의 요소를 스스로 삭제해버렸습니다. 자신에게 끼칠 위험과 손해를 무릅쓰고 오갈 데 없는 아이의 목숨을 구해준 진정한 은인을, 문신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 옆에 오면 안 된다고 하는 2021년도 한국의 감성이 난데없이 ‘스페이스 오페라’의 마지막을 덮어버리는 환경에서 과연 세계에 통할 과학 서사가 나올 수 있을지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인간성의 승리: 반딧불이가 밝혀주는 황금의 심장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한 가지를 가르쳐줄 작품을 소개하며 마치겠습니다. 마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감독인 조스 휘던이 만든 <파이어플라이(Firefly)>입니다. 말 그대로 반딧불이처럼 생긴 서리니티(Serenity)호를 타고 사소한 심부름부터 때때론 밀수까지 하여 근근이 살아가는 낮은 지위의 사람들 이야기라는 데서 <승리호>와 비교될 수 있겠습니다. 인류 내전에서 패배한 전직 군인, ‘동반자’라고 불리지만 매춘부라는 눈총을 피하지 못하는 여성, 우주 정부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갈 데 없는 고아남매 등 고달픈 사람들이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유사점은 거기까지일 뿐, 이 작품은 호방한 스케일의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마지막 ‘황금의 심장(heart of gold)’ 편에서는 진정한 윤리와 가치가 과학 서사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가 보여줍니다.

정부의 통제가 닿지 않는 무법의 외딴 황무지 행성, 의지할 것은 서로뿐인 매춘부들의 집. 이곳의 여성 하나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이 나자, 자기 아이라고 믿고 있는 지역의 실력가가 여자와 아이를 탈취하기 위해 여성들의 목숨은 아랑곳하지 않고 습격을 합니다. 서리니티의 선장은 우두머리 여성에게 이길 수 없으니 포기하고 자신들과 도망쳐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그녀는 이 외진 곳까지 흘러들어와 어렵게 쟁취한 자유롭고 독립된 삶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며 끝까지 저항하다 목숨을 잃고 맙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힘으로 일군 공동체를 뺏으려는 강자에 맞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숭고하고 명예로운 가치를 실현한 사람은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이 작품에서는 거대한 우주 안에서 티끌에 지나지 않는 인간 가운데에서도 제일 작고 힘없는 사람이 ‘황금의 심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승리호>의 인물이었다면 어땠을까요? 타이거 박은 문신을 지울 시간이라도 있었지만, 이 여성은 황금을 심장을 갖고서도 회개할 시간도 없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과거의 행적을 ‘흙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용서받을 기회’를 영영 못 갖지 않았을까 합니다.

여러분, 과학의 힘은 우리의 상상으로부터 나옵니다. 연구이든 서사이든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의 힘이 생깁니다. 바깥의 넓은 세상보다는 안쪽의 좁은 세상으로만 가려 하고, 다른 것을 인정하기보다는 우리만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편견은 우리의 상상력을 좀먹고 과학의 앞길을 막습니다. 우리의 과학 서사가 세계에서 통하지 않는 원인은 먼저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통하는 과학 서사를 만드는 능력은 특수 효과 기술력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기원과 미래를 물어보는 깊은 주제의식, 우리의 선입견을 깨부수는 고난과 극복의 인물들, 우리에게만 강제되는 금기와 도덕률을 벗어나려는 과감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서사라는 캔버스에 담아내는 자유로운 사고입니다.

한국의 과학 서사가 세계에서도 통할 날이 오길 기원하며, 긴 강연 들어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박주용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트워크와 복잡계 물리학에 기반한 융합 데이터 과학 전문가로서 노트르담대학교, 하버드 의과대학 데이너-파버 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예술과 과학의 창의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AI 이후 시대를 준비하는 카이스트 포스트AI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고안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시간이 생긴다면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박주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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