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에 할걸” 대체투자로 몰리는 연기금들… “크게 물린다” 경고도 빗발
4400억달러(약 547조5800억원)를 운용하는 미국 최대 공적 연금 기금인 ‘캘리포니아 공무원 퇴직연금(CalPERS·캘퍼스)’은 지난 11월 말 사모 펀드 투자 책임자를 새로 선임하며 전체 포트폴리오에서 사모 펀드 투자 비율을 기존 8%에서 13%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공격적인 기준 금리 인상과 양적 긴축으로 기금의 79%를 투자하던 주식·채권시장이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상반기까지 캘퍼스의 연간 투자 수익률은 -6.1%로 글로벌 금융 위기 때인 2009년(-23.4%) 이후 처음 손실을 봤다. 주식과 채권 투자 수익률이 각각 -13.1%, -14.5%를 기록한 탓이다. 니콜 뮤지코 캘퍼스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이를 두고 “우리는 손실을 방어하기 위해 (주식·채권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했다가 큰 성장을 놓쳤다”며 “지난 10년간(2009~2018년) 사모 펀드에 투자했더라면 110억~180억달러를 벌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주식이나 채권 같은 전통적 투자 상품 대신 부동산·인프라·사모 펀드 같은 대체 투자로 눈을 돌리는 연기금은 캘퍼스뿐만이 아니다. 최근 영국 싱크탱크 공식통화금융기관포럼(OMFIF)이 전 세계 주요 공적 연기금들을 조사한 결과, 거의 절반이 대체 투자를 늘릴 계획으로 나타났다. 이 기관들의 운용 자산을 합치면 3조달러(약 3733조5000억원)가 넘는다. 운용 자산 915조원(작년 10월 말 기준)으로 자산 규모로 치면 세계 5위 공적 연기금인 우리나라 국민연금(NPS) 역시 작년 수익률이 악화되면서 대체 투자 비율을 계속 늘리는 상황이다. 지난 2021년 국민연금 운용 자산에서 12.6%였던 대체 투자(119조3050억원) 비율은 작년 10월 말 기준 16.6%(152조3500억원)까지 늘었다. 미국 뉴욕시도 대체 투자에 대한 투자 한도를 25%에서 35%로 높이는 법안을 최근 통과시켰다. 이 같은 연기금의 대체 투자 쏠림 현상을 놓고 “수익률을 방어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라는 평가와 “투자 실패 위험과 유동성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가 동시에 나온다.
◇주식·채권 동반 하락에 대체 투자↑
통상 주가 하락기에는 안전 자산인 채권에 돈이 몰리면서 채권 가격이 상승하기 마련이다. 가령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에서 16.8% 손실을 본 2018년 국내 채권에서 4.9% 수익을 올렸다. 반대로 주가가 크게 오른 2020년엔 국내 주식에서 34.7% 수익을 냈지만 채권 운용 수익률은 1.7%에 그쳤다. 하지만 지난해는 급격한 금리 인상에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속 경기 침체) 우려가 겹치면서 주식과 채권 가격이 동반 폭락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가장 안정적인 투자법으로 꼽히는 60대40 포트폴리오(자산의 60%를 S&P 500 지수에, 40%를 10년 만기 미 국채에 투자하는 방식)조차 지난해 -15% 수익률로 1937년 이래 가장 처참한 성적을 냈다.
반면 원래 저금리 시기 인기 투자처인 대체 투자는 원자재 가격 상승 등에 힘입어 지난해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수익을 냈다. 주식과 채권 투자에서 쓴맛을 본 캘퍼스만 해도 지난 1년간(2021년 7월~2022년 6월) 사모 펀드와 부동산 투자 수익률은 각각 21.3%와 24.5%를 기록했다. 가입자 77만8000명으로 1012억달러를 운용하는 미국 버지니아 은퇴 연기금(VRS) 역시 같은 기간 주식과 채권에선 각각 14.8%, 10.6% 손실을 본 반면, 사모 펀드와 부동산 투자에선 27.4%와 21.7%의 수익을 거뒀다. 국민연금도 올해 국내 주식과 채권에서 각각 -20.5%, -8.2% 수익률로 고전했지만, 대체 투자에서는 15.6% 수익을 냈다.
그러니 주식과 채권 중 갈 곳이 없어진 연기금들이 대체 투자로 눈을 돌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글로벌 사모 펀드 운용사 콜러캐피털이 지난달 전 세계 사모 펀드 기관 투자가 등 펀드 출자자(LP) 114곳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0%가 향후 3~5년간 연 16% 이상의 수익률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했다. 16% 이상 수익률을 예측한 비율이 30%를 넘은 건 2011년 조사(32%) 이후 처음이다. 응답자의 절반은 연 11~15%의 수익률을 전망했다. 인기 투자처는 신재생에너지에 투자하는 사모 펀드였다. LP의 70%가 “신재생에너지 투자를 늘리거나 시작했다”고 답했다.
고물가와 저성장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연기금들이 대체 투자로 몰려가는 이유다. OMFIF는 보고서에서 “글로벌 경기 둔화와 물가 상승은 앞으로 1~2년 동안 글로벌 공적 연기금과 국부 펀드의 주요 우려 사항”이라며 “그들은 스태그플레이션을 예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유동성 위기 가져올 위험성도
하지만 이런 쏠림 현상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주요 대체 투자처인 부동산이나 인프라는 기본적으로 중·장기 투자이고, 사모 펀드도 한번 돈을 넣으면 짧으면 1년, 길게는 5년간 자금을 뺄 수 없다. 이렇게 길게 돈이 묶여 있으면 요즘 같은 불경기에 자칫 유동성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투자 전략 관리에서 유동성 문제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대체 투자 확대는) 극도로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불거진 영국 연기금 위기는 유동성이 부족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영국 연기금은 국채 기반 파생 상품(LDI)에 가입했다가 영국 정부의 감세 정책발(發) 국채 금리 급등으로 담보를 추가하라는 10억달러 규모의 마진콜을 받으며 파산 위기에 처했었다. 이후 영란은행이 채권을 매입해 인위적으로 국채 금리를 낮추는 긴급 조치로 겨우 숨을 돌렸다.
대체 투자 시장이 공개 시장보다 투명성이 떨어지는 점 역시 투자 위험성을 높인다. 상장 기업은 재무 정보 공시 의무가 있고 중개업자 역시 수수료와 수익률, 자산 가치 등을 명확히 제공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지만 대체 투자 시에는 내부 팀과 외부 컨설턴트에 의존해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 만큼 부족한 정보로 인해 잘못된 투자 결정을 내리기 쉽다. 가령, 캐나다 온타리오 교원연금계획은 세계 3대 암호 화폐 거래소였던 FTX에 9500만달러를 투자했다가 최근 FTX가 파산 신청을 하자 큰 손실을 봤다. 퀘벡 연기금 역시 지난해 7월 파산 신청을 한 암호 화폐 담보대출업체 셀시우스에 1억5000만달러를 투자했다가 손실 처리를 했다. 파블로 안톨린 OECD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파이낸셜타임스에 “대형 연기금의 경우 뛰어난 자질을 갖춘 팀원들로 구성된 대규모 투자 팀을 갖추고 있어 유동성 부족에도 잘 대응할 수 있지만, 중소 연기금은 그럴 능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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