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순수 예술로 꽃피우다

김예진 2023. 1. 12.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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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마르지엘라 개인전
패션 브랜드 ‘메종 마르지엘라’ 창립자
베일에 싸인 천재 디자이너로 유명세
설치·조각·평면 회화 등 50여개 작품
롯데뮤지엄서 3월26일까지 국내 첫 선
벨벳과 메시·실리콘 등 다양한 소재 활용
물질과 신체 등 선명한 주제의식 드러나

16세기 화가 카라바조나 렘브란트 유화가 연상되는 유난히 깊고 검은 배경의 회화 작품은 실은 벨벳 천 위에 하얀색 오일 파스텔로 그린 그림이다.

창밖 풍경이 비치는 반투명 커튼인 것처럼 보이는데 실은 메시 소재 천에 그려진 그림일 뿐 그 뒤는 흰 벽이다. 벨벳이 그 어느 회화의 배경보다 더 깊은 검정 화면으로 보인다는 것도, 메시 소재가 회화의 표면이 돼 이렇게 눈속임할 수 있다는 점도 신선하다. 이런 다양한 소재의 특성을 진작 이해하고 미술 작품처럼 활용한 작가는 바로 패션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66)다. 그제서야 다양한 소재를 활용할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어떻게 생각해냈을지 수긍이 간다.
‘토르소 시리즈’(2018∼2022). 롯데뮤지엄 제공
벨벳과 메시, 블라인드, 실리콘, 인조 머리카락 등 다양한 소재만으로도 흥미로운 이 전시장은 유명 명품 패션 브랜드 ‘메종 마르지엘라’의 창립자 마틴 마르지엘라의 개인전 현장이다.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에 위치한 롯데뮤지엄에서 설치, 조각, 영상, 퍼포먼스, 평면 회화 등 작품 약 50점이 관람객을 맞는다. 프랑스 파리, 중국 베이징에 이어 세 번째 개인전이자, 국내 첫 대규모 개인전이다.

벨기에 출신인 마르지엘라는 1980년 예술학교를 나온 뒤 이탈리아와 벨기에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패션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파리로 이주해 1984년부터 1987년까지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의 어시스턴트로 활동했고, 1988년 자신의 브랜드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를 설립했다.
‘바니타스’(2019). 롯데뮤지엄 제공
컬렉션을 소개할 때 도시 외곽 우범지대, 폐허 같은 곳에서 런웨이를 하는 등 전위적이고 파격적인 행보로 명성을 떨쳤다. 관습을 깨고 독창적인 디자인을 추구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가 유명해져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어 ‘베일에 싸인 천재 디자이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런 그는 2008년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 20주년 기념 쇼를 마지막으로 패션계를 은퇴했고 순수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패션계에 몸담을 때부터 이미 패션이란 신체를 미디어로 한 예술이라 여겼고,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어 순수 예술의 길로 들어선 것이라고 한다.

전시장에서는 디자이너 시절부터 탐구해온 주제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물질과 신체, 성별에 대한 관념, 시간의 영속성 등이다.
‘데오도란트’(2020∼2022). 롯데뮤지엄 제공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것은 일상용품인 데오도란트 이미지다. 데오도란트는 땀이 흐르며 분비되는 체취를 덮기 위해 사용하는 제품이다.
작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대 서구인이 생활 필수품으로 지니는 데오도란트에서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소한 데까지 ‘매력적인 신체’, ‘특정 기준에 부합하는 신체’로의 관리 강박을 봤다. 작가는 데오도란트 이미지를 콜라주 기법으로 활용한 작품을 통해 자연스러운 땀의 흔적을 없애고, 비인간적인 체표면으로 탈바꿈하는 현대인의 처지를 자각하게 한다.
‘레드 네일스’(2019). 롯데뮤지엄 제공
‘레드 네일스’ 역시 현대인의 아름다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한 작가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새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플라스틱 인조 손톱을 커다랗게 형상화하고 벽에 방치된 것처럼 세워 놓은 모습이다. 매니큐어는 지금은 흔하게 사용되는 일상 용품이지만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1920년대 자동차 컬러 광택제가 개발되면서 함께 만들어졌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인조 손톱은 인공적 아름다움을 만드는 장치로 발전했다. 매니큐어가 생긴 이래 새빨간 매니큐어는 매혹적 여성의 상징으로 쓰였다. 누군가는 여전히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고, 누군가는 거부감과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는 새빨갛고 커다란 인조 손톱 모형을 통해 작가는 현대사회가 정한 아름다움의 전형, 상징, 구성 원리, 재료 등을 강렬하게 환기시킨다.
‘보디 파트 블랙 앤드 화이트’(2018∼2020). 롯데뮤지엄 제공
신체 일부를 분리하고 확대해 낯설게 만드는 방식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실리콘 조각 작품 ‘토르소’나 평면작품 ‘보디 파트 블랙 앤드 화이트’ 등은 이것이 신체의 어느 곳인지, 이 신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게 함으로써, 젠더 관념에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전시장에는 창의적인 디스플레이나 작품 배치 등에서도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곳곳에 최첨단 유행을 이끈 세계적 디자이너 출신 작가 특유의 트렌디한 디테일이 꼼꼼하게 스며 있어서다.

가령 전시장 입구엔 흔히 놓여 있는 전시 내용 소개 리플릿 대신, 무료 자판기가 비치돼 있다. 버튼을 누르면 상자가 나오는데, 이 상자를 펼쳐보면 미로처럼 꾸며진 전시장 지도와 작품 배치도가 있다. 전시 관람을 시작하는 관람객이 느끼는 설렘을 한층 배가하는 장치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평범한 블라인드를 곳곳에 친 이유는 가벽을 대신하기 위해서다. 한 작품, 한 작품 마주할 때마다 몰입할 수 있도록 공간을 분리하고자 하면서도, 유동적이고 모호한 경계를 만들려는 의도다.

사회의 관념과 기준, 신체를 강박하는 관념, 아름다움 등에 대해 질문을 던져 모호하고 유동적인 상황을 즐기라고 유도하는 작품들에 딱 맞는 가벽인 셈이다.

전시장 벽면에 전시 서문이나 작품 캡션을 일부러 구겨진 종이로 불완전하게 붙인 데에선, 일반적인 미술 전시장의 엄격하고 권위적인 공기를 바꿔내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3월26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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