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채경의 랑데부] 화성의 경칩을 기다리며
심채경 |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1880년대 초 어느 봄날, 한 서양인이 사진기를 들고 조선에 왔다. 일부 관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는 낯선 존재였다. 유독 키가 크고 피부색이 다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글을 썼다. 그는 조선 사람들의 사진을 남기고 싶었지만, 기꺼이 그의 사진기 앞에 서는 이는 드물었다. 외계인이 지구에 온다면 어떨까? 처음 보는 이상한 외계 물건은 호기심을 자아내기도 하겠지만 두려움의 대상일 수도 있다.
일부 관료들은 조금 달랐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듬해 미국 공사 푸트가 내한하자, 고종은 이에 대한 답례와 양국 간 친선을 위해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했다. 이때 보빙사 임무를 함께 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보빙사 일행은 출국하는 길에 일본에 들렀는데, 마침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그가 합류해 보빙사 활동을 도왔고, 그 인연으로 조선을 방문하게 됐다. 처음으로 고종의 사진을 찍은 인물, 미국인 퍼시벌 로웰이다.
그는 낯선 사회를 관찰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조선에 다녀간 뒤에도 일본에 머무르며 극동아시아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글과 사진 등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조선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칭한 것도 로웰이다. 10여년 뒤 미국에 돌아간 그는 동양보다 더 먼 낯선 세계로 관심을 돌렸다. 다름 아닌 화성이었다.
망원경으로 화성을 자세히 보면 구불구불한 줄무늬 같은 것이 있다. 마치 좁고 깊고 아주 긴 계곡이나 강처럼 보인다. 전문가용 망원경, 연구용 천문대가 드물던 시절, 화성에 계곡 같은 게 있다는 정보를 접한 로웰은 누군가 화성에 거대한 계곡을 만들었다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자비로 천문대를 만들고 큰 망원경을 설치했다. 그 망원경으로 화성을 관찰하고 자신이 본 것을 그림으로 남기는 데 수많은 나날을 보낸 그는, 화성 표면의 무늬는 기하학적인 도형이며 자연적인 지형이 아니라 인공 운하라고 주장했다. 파급력이 컸다. 인공 운하가 있다는 것은 지적 능력을 갖춘 외계 생명체도 존재한다는 뜻이니까.
로웰의 눈길을 끈 화성 표면의 특징 중 하나는, 문제의 무늬가 가끔 희미해진다는 것이었다. 그곳의 문명은 인공적인 운하를 팠다가 메웠다가 할 수 있는 것일까? 로웰이 뿌린 궁금증의 씨앗은 이후 더 크고 발전된 망원경이 등장하면서 천문학자들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졌다. 화성 문명에 대한 믿음과 기대는 점차 가늘어지면서도 수십년 동안 명맥을 유지하다가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는 시대가 시작되면서 마침표를 찍게 됐다.
그곳에 아무도 없다면, 문명이 아니라 동물, 아니 식물조차도 없다면, 화성의 계곡은 왜 때때로 사라지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그 답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마션>에서 주인공인 우주비행사(맷 데이먼)를 곤란케 했던 먼지 폭풍이다. 화성의 대기는 지구보다 10배 희박하지만, 거기에도 바람은 분다. 그 바람은 때로 거대한 폭풍으로 발전하는데, 그 규모가 화성 전역을 뒤덮을 정도다. 게다가 오래 지속된다. 화성 표면에서 보면 하늘이 먼지로 뒤덮이고, 화성 밖에서 보면 표면이 죄다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먼지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는 탓에 화성 표면에서 운영하는 착륙선과 행성 표면 탐사 로봇인 로버는 전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다. 태양열 전지판에 먼지가 쌓여 충전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있다면 닦아낼 테지만 손발이 지구에 묶여 있으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다. 그런데 때로는 지독한 먼지 폭풍이 되레 도움이 되기도 한다. 태양열 전지판에 쌓여 있던 먼지를 날려 버리면 다시 햇빛을 잘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2021년 5월 중국 탐사선 톈원 1호가 화성 표면에 착륙했다. 함께 실려 있던 로버 ‘주룽’이 화성 표면을 돌아다니며 여러달 동안 탐사 활동을 벌였다. 본래 예정했던 석달가량 임무를 잘 마친 뒤에도 계속 활동을 이어가던 주룽은 겨울과 먼지 폭풍을 버텨내기 위해 동면하고 있다. 화성에도 계절이 있다. 화성 표면, 주룽이 있는 곳에는 얼마 전 봄이 시작됐지만 주룽은 아직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로웰이 기대한 생명체는 없었지만, 주룽이 긴 동면에서 깨어나는 날을 화성의 경칩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아직 이곳에는 겨울이 한창이지만, 먼 곳의 반가운 봄소식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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