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없는 서재와 만나다
[김상균의 메타버스]
[김상균의 메타버스] 김상균 | 인지과학자·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기자님, 제 서재에는 촬영 시 배경으로 쓸만한 서가가 없습니다.”
언론에서 교수나 전문가와 인터뷰할 때면 흔히 책이 빼곡하게 꽂힌 서가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내 연구실과 서재에는 책꽂이 자체가 없어서, 촬영 온 기자분이 당황하는 경우가 많기에 이렇게 미리 알려드린다.
필자의 서재에 눈에 보이는 책이 없는 이유는 책을 구매하고 활용하는 방식이 조금 독특하기 때문이다. 첫째, 가능하면 전자책으로 구매하고, 전자책이 없는 경우만 종이책을 구매한다. 둘째, 읽지 않은 채 보관하는 책이 다섯권이 넘지 않게 유지한다. 셋째, 책을 읽은 후 중요 부분을 발췌하여 별도 문서에 보관하며, 이때 책에 관한 내 의견도 일부 담는다. 전자책인 경우에는 잘라서 붙이기 기능으로 발췌하고, 종이책인 경우에는 직접 타이핑해서 문서에 옮긴다. 넷째, 다 읽은 종이책은 가급적 주변에 선물하거나, 외부에 기증한다.
이렇게 책을 소비하는 배경에는 개인적 취향, 책을 잘 소화하려는 취지, 환경적 고려 등 몇가지 이유가 있으나, 이번 글에서는 공간과 관련된 면만 살펴보겠다. 교수 연구실은 보통 20㎡ 정도 크기다. 책꽂이 자체가 들어갈 면적과 사람이 책꽂이를 활용하는데 필요한 면적을 고려하면, 책꽂이 하나가 차지하는 공간은 어림잡아 최소 1㎡는 된다. 내 주변 교수들은 연구실에 평균적으로 예닐곱개의 책꽂이를 두고 있다. 연구실 공간의 3분의 1을 책이 차지하는 셈이다.
선배 중에는 연구실에 책꽂이를 20개 둔 경우도 있었다. 헌책방처럼 책꽂이가 촘촘하게 채워진 공간의 구석에 작은 책상을 두고 있었다. 그분은 본인 연구실에 어떤 책이 있는지, 없는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내가 책을 다루는 방법을 소개했더니 몹시 놀라워했다. 책은 무조건 종이책으로 읽어야 맛이 나며, 나중에 볼일이 있으니 반드시 보관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연구와 교육이 본분인 학자이기에 책을 소중히 다루는 마음이야 당연하겠으나, 자신의 공간을 책에 내어주고 좁은 구석에 물러앉은 선배를 보며 안타까운 감정이 들었다.
집에 수천권의 책을 보유한 지인들이 적잖다. 본인이 거주하는 집의 공간에서 적잖은 비율을 책에 내어주고 있다. 집이 좁아서 더 큰 곳으로 이사하고 싶은데, 최소 수억원이 필요해서 옮기지 못한다는 지인에게 필자는 책만 비워도 공간이 충분해지지 않냐고 물었다. 지인은 필자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책을 비운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렵다고 답했다.
지구의 물리적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더 넓은 공간을 꿈꾸는 우리의 마음 때문에 공간 비용은 경제적 희소성의 원칙으로 계속 올라가고 있다. 미국의 미네르바 스쿨은 물리적 강의실 공간 없이 운영하는 대학이다. 강의실 공간에 투자하는 비용을 전환하여 교수당 학생의 비율을 낮추고,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는 등의 목적에 쓰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단기간에 학생, 기업들이 주목하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물리적 공간을 디지털 공간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소비자가전박람회)에는 다양한 메타버스 관련 전시물이 선보였다. 그중에는 명상을 위한 메타버스가 있었다. 높은 층고의 고풍스러운 서재, 비 내리는 넓은 개인 정원,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펜트하우스 등에서 명상을 즐길 수 있다. 많은 이들이 탐하는 공간을 메타버스를 통해 저비용으로 제공하는 접근이다.
이번 글을 통해 필자는 우리가 물리적 공간을 다 없애버리고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처럼 작은 캡슐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연구실을 책에 내어주고 구석으로 쫓겨난 선배, 존폐의 갈림길에 선 수많은 대학 등을 포함해서 우리는 물리적 공간과 디지털 공간의 조화를 모색할 시점에 놓여있음을 말하고 싶다. 디지털 공간으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의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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