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가 창문을 넘는 이유
[크리틱]
[크리틱] 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보이지 않는 도시> 저자
척관법에서 미터법 면적으로 바뀐 지 어느덧 15년이 흘렀지만, 현장에서는 평 개념의 위세가 여전한 게 현실이다. 내년부터 바뀐다고 하는 만 나이 계산법 때문에 자기가 올해 만으로 몇살인지 서로 확인하느라 새해 초 다들 분주했으리라. 생일 기준으로 하는 만 나이를 새해에 계산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인지부조화지만, 평처럼 수백년을 이어온 우리의 습속이 금방 바뀔 리는 없다. 이렇게 전통 ‘국산품’과 서구 ‘수입품’이 충돌하는 또 하나의 지점은 연말과 연초의 구분이다.
희한하게도 우리는 연말을 그레고리력(양력)으로, 연초를 태음력(음력)으로 인지하는 버릇이 있다. 양력 기준으로 성탄절이 끼어있는 12월 말, 한해가 끝나간다는 아쉬움에 지난 일도 돌아보고, 지인들과 망년회도 하고, 마지막 밤 카운트다운도 하지만, 정작 진짜 새해 인사는 음력 정월 초하루가 돼서야 나눈다. 그러니 양력 12월31일과 음력 1월1일 사이 한달여는 새해인 듯 아닌 듯 문화적 미아(迷兒)의 시간이 되곤 한다.
그런 모호함의 훼방에도 연말연시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사람들이 ‘마법’에 걸리기 때문이다. 유독 이때만 채워지는 구세군 냄비는 (양력이든 음력이든) 하나의 주기가 바뀌는 순간에는 그동안 살아내느라 바빴던 발걸음을 잠깐 멈추고, 뒤를 돌아보고, 주변을 살펴보고, 이웃에 눈길을 주는 우리의 속 모습을 투영해 준다. 세상이 각박해졌다 해도 이럴 때 보면 사람들이 그리 고약한 존재 같지만은 않다. 모두에게 지난해보다 나은 새해가 되기를 바라본다.
12월에 유럽에 와본 적 있다면 길거리 집집 창문마다 매달려있는 재미있는 인형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사다리를 타고 창문으로 올라가는 형상의 산타클로스 인형이다. 동화에는 굴뚝을 통해 들어온다고 알려졌지만, 굴뚝 있는 집이 드문 요즘에는 창문으로 몰래 들어가 아이들 선물을 배달하나 보다. 이 인형을 본 행인은 하나같이 일행에게 저것 보라고 손짓하며 서로 미소 짓는다. 그 인형이 재미있어서지만, 사실 그보다는 인형을 매단 집주인의 마음이 느껴져서다. 자기 집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인형은, 오로지 그 집 앞을 지나가는 이웃 보라고 걸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사람의 소박한 마음이 동네를 데우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꽤 오래전에 살던 아파트 1층에 한 노부부가 새로 이사를 왔다. 어차피 매년 봄에는 이사 오가는 세대들로 붐비기 마련이라 처음엔 그 집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 집은 무언가 달랐다. 발코니 확장공사가 합법화(2005년)되기 전이라 대부분 세대가 쉬쉬하며 외부 새시를 설치하고 발코니 확장공사를 하던 때였다. 더구나 1층은 도난의 우려와 오가는 행인의 시선을 가리기 위해 발코니 외부 새시가 필수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이사 첫날, 기존 새시를 철거한 그 집 할머니는 새시없는 원형 그대로의 발코니에 화초를 하나둘 기르기 시작하더니 몇달 안 돼 수십가지 꽃으로 가득 찬 화원처럼 꾸미는 게 아닌가.
정말 낯선 변화는 그즈음 시작됐다. 아파트 현관에 들어설 때마다 무의식중에 그 집 발코니 화단을 살펴보며 어제보다 한 움큼 더 자란 라일락에 나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주민들도 현관에 들어서기 전 발걸음을 멈추고 그 집 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꽃 덕분에 아파트 현관이 동네 사랑방이 된 것이다. 그 아파트가 ‘우리 동네’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할 즈음, 집으로 돌아오는 내 손에는 발코니에 놓을 수국꽃 화분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이었다. 나는 승강기 안에서 마주친 이웃과 처음으로 인사했고 그 역시 내일 꽃을 사와야겠다 했다. 주민들은 할머니의 마음에 ‘전염’돼가고 있었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구급차 블박도, 연번기록도 사라져…이태원 진실 묻힐까 두렵다”
- ‘원청’이 노무 지배 확산…법원 “교섭의무 져야 노동3권 보장”
- 강제동원 해법에 일본은 빠졌다…정부·우리 기업, 배상 나서
- 검찰 “대장동 증거 충분”…이재명 조사 조만간 나설 듯
- ‘빌라왕’ 문자 받은 배우…병원 청소, 빌딩 청소 사이에 하는 일
- 사용자 아닌 ‘노조 부당노동행위’ 척결?…노동부, 경영계 숙원 푸나
- “‘성착취물 산업’ 설계자가 고작 징역 5년?”…양진호 형량 반발
-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 “자진귀국 하겠다”…이르면 내일 입국
- 이태원 유족 “몰랐다는 국가의 대답, 그게 썩은 거 아닙니까”
- “일 기금참여 기대하면 안돼”…강제동원 정부해법에 “매국노” 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