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딸, 손녀 ‘덴마크 3대’ 가족 유산이 한국에 온 이유
[짬][짬] ‘덴마크 가족의 선’ 전시 하정·율리
하정(46)은 2016년 유럽여행 중 덴마크 사람 율리 브레이네고르(51)를 우연히 만나 그의 집까지 따라간다. 그곳에서 3대에 걸쳐 내려온 가구, 옷, 그릇, 수공예 작품 등에서 감명을 받는다. 1900년대 중반 활동한 산업디자이너였던 할아버지 오게로부터, 보석 디자이너였던 엄마 아네테를 거쳐, 책이나 누리집에 실릴 일러스트와 사진을 고르는 포토 에디터인 율리까지 이어진 선을 발견한다. 하정은 이들의 삶을 알고 싶어 2017년 한 달 동안 모녀와 함께 살며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기록하는 ‘포토 북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결과를 2018년 책으로 만들어 아네테와 율리에게 선물했다. 애초 상업용이 아니었기에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도 없이 300권만 찍은 책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는 독립서점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났다. 하정은 2019년 1인 출판사 ‘좋은여름’을 등록하고 책을 정식 출판했다.
한국 독자들은 책 속에 담긴 덴마크 가족의 유산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최근 율리가 몇몇 물건을 챙겨 한국으로 날아왔다. ‘덴마크 가족의 선’ 전시 첫날인 지난 6일 오후 서울 효자동 우물 갤러리에서 율리와 하정을 만났다. 전시는 21일까지 계속된다.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를 미리 읽지 않았다면 전시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한옥을 고친 작은 전시장에 걸린 물건들은 평범했다. 그런데도 갤러리를 찾는 사람은 끊임없었고 잘 아는 물건인 양 반가워했다.
갤러리 한쪽 벽에 붙은 오래된 엽서들이 가장 많은 시선을 받았다. 1950년 무렵 아네테가 꼬마일 때부터 오게가 보낸 엽서였다. 해외 출장을 가서 보낸 것도, 함께 살며 보낸 엽서도 있었다. 아버지는 딸이 결혼한 뒤에도 엽서를 보냈다. 동네 미술관에서 전시를 본 뒤 기념엽서에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보내기도 했다. 율리는 “할아버지는 가장 마음에 드는 엽서를 골라 엄마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자신을 남기고, 엄마에게는 세계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2014년 사망한 오게의 작품은 미국 뉴욕현대미술관과 덴마크 디자인뮤지엄에 전시됐다. 그는 주로 나무 손잡이를 접목한 스테인리스 주방용품과 실험적 디자인의 유리제품을 만들었다.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 남긴 기초 스케치와 메모 등을 그대로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국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벽지였다. 오게는 어린 아네테와 쌍둥이 남동생이 그린 낙서 같은 그림을 벽지로 디자인해 공모전에 출품했다. 그때 뽑히진 못한 벽지는 70년 뒤 한국의 갤러리에 전시된다.
2016년 우연히 찾은 율리네 집에서
산업·보석디자이너, 사진에디터로
3대 이어진 가구·옷 ‘유산’ 보고 감명
조부가 만든 벽지, 엄마 ‘탄생자수’ 등
‘3대 이야기’ 책 내고 21일까지 전시도
“소중한 것들 나눌 때 의미있는 영향”
덴마크에서 생일을 맞은 하정에게 율리는 할아버지의 유품인 1930년대 연필 열 자루를 상자째 선물했다. 그 가운데 3자루는 오게가 사용했던 흔적이 있었다. “가족의 소중한 유산을 내가 가질 수 없다”며 하정은 손사래를 쳤지만 율리는 “할아버지도 네가 갖기를 원하실 거”라며 기꺼이 내줬다.
율리네 동네에서 벼룩시장이 열리자 가족은 지하 창고에 보관하던 유품을 정리했다. 토론을 거쳐 일부를 시장에 내놓았다. 율리는 “이 물건을 정말 필요로 하고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나눠야 물건도 다음 삶을 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독신인 그는 멘토에게 “우리 가족의 소중한 역사와 유산을 물려줄 아이가 없어 안타깝다”고 털어놓았을 때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누군가에게 베풀고 나누는 것이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하정은 “가족에게 물려주는 게 유산이라면 핏줄만이 가족이 아니”라며 “독신인 저 역시 내 핏줄이 아닌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물건이 아닌 생각과 가치관도 유산이 될 수 있구나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갤러리 벽에 걸린 하얀 천에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빨간 벽돌과 파란 창틀의 학교, 손을 맞잡은 연인과 강아지 등 여러 그림 사이에 수 놓인 글자와 숫자는 율리와 여동생의 이름 첫 글자와 태어난 해다. 율리는 “덴마크의 엄마는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혹은 한창 자라는 아이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며 자수를 놓는다”고 했다. 아네테는 둘째 딸을 임신한 1981년 첫수를 놓고 33년 만인 2014년에 작품을 완성했다. 하정은 ‘탄생 자수’라고 이름 붙였다.
오래된 노트 ‘크리스마스 북’에는 신문, 잡지에서 오려 붙인 크리스마스 관련 그림과 우표가 붙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언저리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선물을 주고받았고, 어떤 음식을 만들었는지 세세한 기록이 여러 사람의 손글씨로 가득했다. 율리네 가족은 연말이면 ‘크리스마스 북’을 꺼내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았다. 하정은 지난해 연말 서울 중구구립도서관에서 ‘크리스마스북 만들기’ 행사를 가졌다. 연말에 가족이 함께한 시간을 기록하고 모으자는 취지였다.
하정은 “예전에는 ‘우리는 왜 간직하지 못했을까’ 생각했는데, 덴마크의 문화와 역사를 알게 되면서 우리 민족과 가족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뿌리가 얇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6·25 때 내려오신 부모님께 감수성을 물려받을 수 없었던 건 그분들도 단절됐기 때문이잖아요. 덴마크는 우리처럼 외세 풍파로 도시가 파괴된 적이 없더라고요. 우리 역사에 애틋함을 느꼈고, 이제 뭔가 모으고 간직하는 세대로 우리가 시작이구나 생각했어요.” (하정)
원낙연 선임기자 yan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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