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 ‘마약·범죄 부검’ 언급한 검·경 또 있었다

이혜리 기자 2023. 1. 1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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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후 시신 부검 제안 사례 18건
‘마약’ 언급 등 범죄 관련성 언급도
책임 회피·본질 흐리기 의도 지적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과 시민대책회의 회원들이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계단에서 국정조사 연장 및 철저한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이태원 참사 발생 직후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이 유가족에게 희생자 시신의 부검을 제안한 사례가 최소 18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참사 원인이 ‘압사’가 명확한데도 범죄와의 연관성을 찾는 부검을 제안한 것은 정부 책임을 회피하거나 참사의 본질을 흐트러뜨리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12일 경향신문이 확보한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의 자체 조사 자료를 보면, 지난해 10월29일 참사가 발생한 직후 유가족이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으로부터 희생자 시신의 부검을 제안받은 사례가 최소 18건 있었다. ‘마약’을 언급하는 등 범죄 관련성을 염두에 두고 부검 여부를 물은 사례도 있었다. 검사·경찰관이 시신이 안치된 장례식장에 찾아오거나 전화로 묻는 등 방식은 다양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앞서 논란이 된 광주지검의 경우이다. 광주지검 한 검사는 장례식장에서 장례 준비를 논의하던 유가족에게 찾아가 부검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유가족이 왜 부검해야 하는지 되묻자 검사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마약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근거나 정황을 확인하기 위해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참사 다음날인 지난해 10월30일 새벽 한 유가족은 서울지역의 응급실에 있다가 경찰관으로부터 부검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유가족이 부검하지 않겠다고 하자 해당 경찰관은 ‘검사가 마약과 관련해서 부검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유가족이 화를 내자 경찰관은 ‘자신이 검사에게 부검 의사가 없다고 전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경기지역의 한 유가족은 검사로부터 ‘마약 등 수사를 위해서 부검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말을 듣고 ‘멍이 많고 누가 봐도 압사에 의한 사망인데 왜 부검을 해야 하느냐’고 답한 것으로 조사됐다. 다른 유가족은 사고 직후 시신이 옮겨진 경기지역 병원에서 서울 내 장례식장으로 희생자를 이송하는 과정에서 경찰로부터 ‘범죄나 마약에 연루됐을 수 있으니 부검을 할 의향이 있느냐’는 말을 들었다.

서울지역의 한 병원에 있던 또 다른 유가족은 검사로부터 ‘사인을 알기 위해서 부검을 해야 한다. 마약 등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유가족은 ‘사인이 명확한데 왜 부검이 필요하느냐. 부검은 2차 가해’라는 입장을 전했다고 한다.

경찰관이 부검 제안을 넘어 ‘부검은 해야하는 것’이라고 말한 사례도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해당 유가족은 나중에 다른 경찰관으로부터 부검은 범죄혐의점이 있는 경우 선택사항이라는 말을 듣고 부검하지 않는 것으로 정했다.

사망 원인과 범죄 관련성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관이 검시를 마치고 유가족들이 신원 확인을 했는데도 경찰관이나 검사가 부검 의사를 묻거나, 경찰관과 검사가 중복해서 부검 의사를 물은 사례도 있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계단에서 국정조사 연장 및 철저한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을 마친 후 울먹이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이들 유가족들은 모두 수사기관에 부검을 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유가족들은 부검 제안을 받으면서 ‘왜 부검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하고 구체적인 설명을 듣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청 훈령인 ‘변사사건 처리규칙’은 타살이 의심되거나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 집단 변사·아동학대 등 사회적으로 이목이 집중된 경우, 사인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에 부검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수사상 부검이 필요한 경우에는 수사기관이 유족에게 그 사유를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규칙은 유가족이 사망 원인에 의혹을 제기하는 때는 수사기관이 부검을 고려하라고 규정하지만 이태원 참사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갑작스런 참사로 유가족들이 경황이 없던 터라 부검 제안을 한 검사와 경찰관의 정확한 성명·소속 등 인적사항은 제대로 취합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전체 희생자 중 부검이 이뤄진 사례는 3건으로 알려졌다.

희생자들의 사망 원인이 ‘압사’임이 명백하고 참사 당시 상황을 촬영한 사진, 영상 등 자료가 상당히 많으며, 생존자·목격자가 다수 있는데도 마약 등 범죄와 연관지어 유가족에게 부검 의사를 타진한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2차 가해가 될 여지가 있을 뿐 아니라, 정부의 미흡한 대처로 발생한 압사 사고라는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 발생 직후부터 일부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이태원에 간 게 잘못’이라거나 ‘마약 가능성’이 제기됐다. 참사 책임을 정부 대응 잘못 등 구조적인 데서 찾는 게 아니라 개인에게 돌린 것이다. 수사기관이 부검을 제안한 배경 역시 그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있다는 지적도 있다. 더구나 참사 당일 경찰이 예년과 달리 이태원에 인파 관리 요원을 배치하지 않은 것을 두고 ‘마약 단속에 집중하느라 그런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터다.

부검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2016년 고 백남기 농민이 경찰 물대포에 맞아 숨진 뒤 수사기관이 일방적으로 부검을 시도해 비판을 받았다. 지난해 광주 학동 건물 붕괴 참사 유가족은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희생자가) 엄청난 양의 잔해에 압사돼 처절한 고통을 받으며 사망했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지만 수사기관이 부검하자고 해 부검했다’며 부검의 문제점을 호소했다.

김보성 대검찰청 마약조직범죄과장은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검사가 유가족에게 마약과 관련해 부검을 요청한 적이 없으며, 광주지검 사례는 사인을 명백히 밝히기 위해 절차를 안내하려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대검도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대검에서 일선 검찰청에 마약과 관련한 별도의 지침을 내린 사실은 없다”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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