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벨트 안했네”...제주 오픈카 사망사고 살인혐의 무죄
’위험운전 치사’로 징역 4년형
2019년 11월10일 새벽 1시쯤, 지붕이 열리는 컨버터블형인 ‘오픈카’가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의 한적한 편도 2차선 도로를 질주했다. 운전자 김모(35)씨가 운전한 렌터카의 조수석에는 여자친구 조모(당시 28세)씨가 있었다. 같은 해 1월 만난 이들은 제주로 300일 여행을 왔고, 렌터카를 빌려 제주를 여행 중이었다.
제한속도 50㎞ 도로에서 오픈카는 굽은 도로 오른쪽 인도로 돌진해 연석과 인도 옆 돌담, 2차로에 주차돼 있던 경운기를 잇달아 들이받았다. 차량의 앞부분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안전띠를 맨 김씨는 별로 다치지 않았지만, 안전띠를 매지 않은 조씨는 차 밖으로 튕겨 나가 크게 다쳐 10여차례 대수술을 받는 등 치료를 받았지만 9개월여만인 2020년 8월23일 숨졌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사고 당시 운전자 김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운전면허 취소 대상인 0.118%였다. 전날 오후 4시쯤 제주에 도착한 이들은 렌터카를 빌려 여행을 다닌 뒤 오후 8시40분쯤 숙소 인근 해수욕장에서 밤 11시50분까지 술을 마셨다. 이 자리에서 김씨는 여자친구 조씨에게 헤어지자고 요구했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김씨는 그 전에도 카카오톡 등으로 이별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숙소로 돌아온 뒤 조씨가 “라면을 먹고 싶다”고 하자 김씨가 운전하고 조씨는 조수석에 타고 새벽 0시55분쯤 길을 나섰다. 김씨는 달리는 차에서 안전벨트 미착용 경고음이 울리자 조씨에게 “안전벨트 안했네”라고 했고, 조씨는 “응”이라고 답했다. 이어 김씨는 속도를 높였고 질주하다 사고로 이어졌다.
사고 당시 상황은 차량 블랙박스와 에어백 컨트롤 모듈에 기록됐다. 특히 에어백 컨트롤 모듈은 심한 충격으로 파손됐지만 경찰은 경기도에 있는 판매업체까지 찾아가 관련 정보를 복원할 수 있었고, 제한속도 두배를 넘는 과속과 급가속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사를 맡은 경찰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위험운전치상 혐의와 음주운전 혐의로 김씨를 검찰에 넘겼다. 위험운전치상은 ‘음주 또는 약물의 영향으로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여 사람을 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에 적용되는 죄목으로 징역 1년 이상 15년 이하, 또는 벌금 1000만원 이상 3000만원 이하 처벌을 받는다.
경찰 관계자는 “국과수는 ‘안전벨트 안했네’ 한 뒤 가속됐다고 하고, 도로교통안전공단에서는 (급가속한) 운전자의 개인적인 의도는 분석이 불가능하다고 회신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검찰의 생각은 달랐다. 경찰에서 넘어온 이 사고를 수사하던 검찰은 조씨가 숨지자 작년 4월28일 운전자인 김씨를 ‘위험운전치사’가 아닌 ‘살인’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 카카오톡 문자와 블랙박스 녹음파일 내용 등을 분석한 결과, 이별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조씨에게 불만을 품은 김씨가 고의로 사고를 낸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검찰은 특히 블랙박스에서 확인된 정황에 주목했다. 조수석 안전벨트 미착용 경고음이 울린 뒤 “안전벨트 안했네”라고 물은 뒤 갑자기 급가속해 사고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검찰은 법정에서 무리하게 급가속을 하게 될 경우 2차로에 주차된 지역 주민들의 차량을 충격하거나 인도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지붕이 열려 있는 차량의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고 있던 피해자가 급가속으로 인한 교통사고 발생 시 차량 밖으로 튕겨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급가속해 인도 쪽으로 돌진해 조씨를 숨지게 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씨 변호인 쪽은 재판과정에서 “안전벨트를 안했다는 말은 주의를 환기하는 말로 봐야 하지 살해 동기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블랙박스가 녹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은폐하지 않고 살해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검찰은 대화 내용 녹음본과 블랙박스 증거 중 서로 다투는 내용만 발췌 인용하며 살인으로 무리하게 기소했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을 맡은 제주지법은 2021년 12월 김씨의 ‘살인’ 혐의를 무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살인죄에 대한 무죄 판결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검찰 주장만으로는 살인 혐의가 합리적 의심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검찰이 주장한 살해 동기나 정황 등은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고 직접적인 살인의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재판부는 “사고가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범행 수법이나 수단 등에 의문점이 있다”고 말했다. 운전자인 피고인 김씨가 같은 오픈카에 탑승한 채로 급가속해 사고를 냈다는 것은 안전벨트를 맨 자신의 신체도 중상을 입을 수 있는 위험을 포함하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살해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자친구만 죽게 하고 운전자 자신은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는 방법으로 살해를 계획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또 재판부는 “피고인이 사고 직전 급가속을 처음 한 게 아니고 열 번 이상 가속과 감속을 반복하며 운전하던 중이었다”며 고의 살인을 위한 운전방법으로 보이지 않는다고도 설명했다. 오히려 재판부는 “사고 도로는 주행방향에 가로등이 없었고 전방 주시를 해야 하는 앞유리를 통해선 조명이 어둡게 보여 상당히 빠른 상태로 운전한 점을 고려하면 진행방향에서 두 번째로 좌로 굽은 구간을 늦게 발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고의 살인이 아니라 단순 음주교통사고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음주운전 혐의만 유죄로 판단하고, 살인혐의는 무죄로 판단하면서 김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사회봉사 160시간과 준법운전강의 수강 40시간을 명령했다.
2심도 살인 혐의는 무죄, 위험 운전 치사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으나 형량을 높여 징역 4년을 선고했다. A씨가 살인을 하려 했다는 고의성과 관련해 수사 기관의 ‘범죄 증명’이 부족하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도 12일 살인 혐의는 무죄로 본 원심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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