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래는 이탈리아?
출산율은 한 사회의 경제 구조와 상황을 한번에 알 수 있는 지표다. 가족구성을 어떻게 할지는 노동 공급, 소득, 소비, 저축, 시간 사용 행태 등에 전방위적 영향을 미친다. 이를 모두 고려한 결과물이 출산율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0.84명(2020년 기준)으로 압도적 꼴찌인 것은, 사람들이 가족을 만들고 자녀를 양육하는 걸 포기하거나, 자녀 수를 최소화하는 대신 보유한 모든 자원을 자녀에게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런데 OECD 회원국 가운데 출산율이 낮은 나라는 남유럽에 집중됐다. 한국 다음으로 출산율이 낮은 이탈리아(1.24명)를 비롯해 그리스(1.28명), 스페인(1.36명) 등이다. 스웨덴(1.66명), 덴마크(1.67명) 등 북유럽 국가뿐만 아니라 미국(1.64명)의 출산율은 선진국 중 상위권이다. 독일(1.53명), 영국(1.56명) 등은 OECD 평균(1.59명)에 약간 못 미친다. 이탈리아는 조혼인율(인구 1천 명당 연 혼인 건수)도 2020년 1.6으로 꼴찌다. 유럽연합(EU) 27개국 평균(3.2)의 절반에 불과하다. 한국의 조혼인율은 급격히 하락해 2021년 3.8을 기록했다.
출산율이라는 최종 결과물에서 한국과 이탈리아가 최하위권인 이유는 두 나라 모두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대기업 정규직 위주의 복지 혜택, 낮은 여성 경제활동 참가와 남성의 양육 참가 등의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복지 전문가들은 선진국의 복지 체제를 크게 네 개로 나눈다. △미국·영국의 시장 중심 자유주의 △프랑스·독일 등 사회보험 중심의 보수주의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사민주의 △남유럽형 가족주의다. 한국의 복지제도를 4개 유형에 집어넣는다면 남유럽에 가장 가깝다. 사회보험 중심의 현금 복지만 급격히 늘어간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복지·여성 지위 닮은 남유럽과 한국
출산율은 단순히 보조금을 더 지급한다고 늘어나지 않는다. 하비에르 가르시아 망글라노 스페인 나바라대학 교수는 “출산율이 계속 급락하는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남성의 가사 참여가 저조할 뿐만 아니라 남성 위주의 경제활동 구조를 갖고 있다”(‘Gender, Time-Use, and Fertility Recovery in Industrialized Countries’, 2014년)고 지적한다.
거꾸로 여성도 출산이나 양육에 방해받지 않고 노동시장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 나라들은 출산율 ‘방어’에 성공했다. 스웨덴은 1970년대 경제성장이 둔화하고 출산율이 추락하자 시행착오를 거쳐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조건으로 양육과 가사노동에 참여하고 직업 경력을 유지하도록 했다. 미국의 경우 직무급 중심의 유연한 고용구조라는 특징이 역설적으로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문호를 넓혔다. 중산층 가정은 저임금 이주노동자를 고용해 가사노동을 해결하고, 다양한 세액공제 혜택을 받았다.
확대된 불평등 속 고개 드는 포퓰리즘
한국 사회의 바람직한 모델은 미국 또는 스웨덴이었다. 보수는 미국식 시장경제를 본받아야 할 모델로 삼았고, 진보는 북유럽 사민주의의 요소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가운데 현실적 타협안으로서의 모델은 독일 정도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탈리아식 남유럽 경제모델이 고착될 가능성이 가장 커 보인다. 불평등 확대 속에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체제를 전환하기 위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는 사회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병연 서울대 교수는 2006년 논문 ‘정치적 제약과 경제개혁’에서 동유럽 14개국이 자본주의 경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경제적 성과에 영향을 미친 요인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 지니계수(소득분배 상황을 0~1 사이 숫자로 나타낸 지표로,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심하다는 의미)가 높을수록 체제 이행이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또 국민이 미래에 자신이 패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응답하는 비율이 높을수록 체제 이행 성과가 저조했다. 현재의 분배 상태에서 기인한 정치적 지지가 경제개혁 성패에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이탈리아의 경우 압도적 우세를 점하던 기독교민주당이 1994년 무너지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끄는 ‘전진 이탈리아’ 등 포퓰리즘 정당들이 득세하는 정치구조가 계속되고 있다. 마리오 피안타 피사고등사범대학 교수는 “1994~2018년 지속된 장기 침체 속에 근로소득 상위 10%만 이전 소득을 유지했을 뿐, 하위 계층은 심각한 소득 감소를 경험했다”며 “중하위층의 생활수준 악화가 정치적 무당파 증가와 포퓰리즘의 발흥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이탈리아의 지니계수는 1991년 0.62에서 2021년 0.75로 뛰었다. 프란체스코 블로이세 로마3대학 교수는 2020년 논문 ‘이탈리아의 불평등과 투표’에서 불평등 정도가 강하고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선거구일수록 ‘전진’ ‘오성운동’ 등 비전통적인 포퓰리즘 정당 지지가 늘어난다는 결과를 내놨다.
정치·경제의 교착상태 해소라는 과제
한국의 정치·경제 상황은 “경제에 관한 ‘정치적 의사결정’의 위기”(2018년 김동연 당시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가까워 보인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급격히 와해된 국민의힘 계열은 외부에서 공무원(검찰) 출신을 대통령 후보로 끌어와 선거를 치러야 할 정도로 인물, 이데올로기, 정책의 공백 상태가 됐다. 더불어민주당은 불과 5년 만에 전통적 지지 연합 가운데 상당수를 상실하고 대통령선거와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패배했다.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에 진입했지만 노동시장 균열과 자산 격차는 심화됐다. 이는 전통적 정치구조가 무너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정치질서 와해는 경제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는 양상을 낳았다. 일종의 교착상태가 만들어진 셈이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최대 과제는 어떻게 ‘이탈리아형 선진국’으로 가는 악순환에서 벗어날지가 아닐까.
조귀동 <전라디언의 굴레> 저자·<조선비즈> 기자
*조귀동의 ‘경제유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 써주신 필자와 경제유표를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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