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터뷰] 14년 걸려 '그리스 로마 신화' 펴낸 강남길 "아들딸 덕에 완성"

최보란 2023. 1. 1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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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강남길 씨 (더퀸AMC 제공)

"강남길이 그리스 로마 신화랑 무슨 연관이 있냐고요?"

연기 인생 57년 차 배우 강남길 씨(64)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주제로 책을 냈다. 제목은 '강남길의 명화와 함께 후루룩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다. 일상을 담은 에세이라든지 대중의 관심을 반영한 노하우 관련 책을 내는 연예인이 적지 않다. 그런데 그리스 로마 신화라니? 그것도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 3권이 한 세트다. 게다가 14년을 준비했다고 하니, 이건 의심할 여지 없는 '찐' 열정이다.

강남길 씨는 어쩌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이리 푹 빠지게 됐을까?

"2000년부터 4년 동안 두 아이 유학 관계로 영국에서 생활했어요. 내가 영국을 안 갔으면 아마 '오! 마이 고드'라는 책도 못 냈을 것이고, 이번 '그리스 로마 신화'도 못 냈을 거예요. 영국 트라팔카 광장 안에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있는데, 한국 사람들 만나는 약속 장소가 다 거기예요. 그러면 뭐 조금 일찍 가서 기다리다가 들어가서 보게 되요. 또 그 지인들이 영국이 찾아오기도 하고, 식구들이 찾아오면 여행을 하게 되잖아요. 내가 어쩔 수 없이 가이드를 하게 되거든. 그러니 뭔가 좀 알아야 돼요. 근데 영국 뿐 아니라 이탈리아, 터키까지 박물관이며 유적지며 50%는 그리스 로마 신화랑 관련 됐어요. 그러다 보니 나름대로 느끼는 것도 많고, 책도 사서 보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죠."

그렇게 계속 보고 듣고 하다보니, 사람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좀 더 쉽게 접하고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건방진(?) 생각이 들었다고. 방송 일이 없을 때 조금씩 쓰다 보니 원고가 쌓였다. 예쁘게 다듬고 수년에 걸쳐 영국부터 터키까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사진들과 동영상을 수만 장 찍어, 이렇게 3권의 책을 출간하게 됐다. 무엇보다, 유학 중인 아들과 딸을 향한 그리움을 견디게 해 준 소일거리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보고 싶었어요. 지금은 한국 와서 두 녀석이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요. 우리 아이들이 13년 동안 영국에 있었어요. 한국하고 영국하고 8시간 시차가 나요. 통화하려면 꼭 한국 시간으로 새벽 2시나 3시 정도 되니까 잠 못 자고 기다려야 돼. 그러다 보니 기다리면서 책도 보고, 글을 쓰기도 하고. 근데 신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총망라한 책을 못 봤어요. 학자님들하고 교수님들한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진짜 그렇더라고요. 그리고 왜들 이렇게 어렵게 썼는지."

그래서 책 제목도 '후루룩'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렵지 않고 쉽게, 공부가 아니라 재밌는 드라마 보듯이 후루룩 읽었으면 해서.

"왜 '후루룩'이냐, 후루룩 먹듯이 보라고요. 70분 짜리 드라마 대본 2권을 한 시간이면 읽거든요? 분량이 적지 않은데, 서로 얘기하듯이 읽으면 금방 봐요. 드라마는 쉬워요. 근데 그리스 신화가 신화에는 등장하는 신도 많고 이름도 어려워요. 그래서 책에 드라마 캐릭터처럼 올림포스 열 두 신들의 성격이나 특징을 앞에 소개해 놨어요. 내용도 대본처럼 대화체로 쓰고요. 실제 그리스 로마 신화도 거의 희곡 같이 돼 있거든요. 학자들에게는 어색하겠지만 배우인 저에게는 오히려 편하죠. 그리고 줄이 바뀔 때 단어가 끊어지지 않게 편집까지 신경 썼기 때문에 정말 후루룩 읽힐 겁니다."

14년의 시간은 물론이거니와 박물관 답사를 위한 여행 비용이며 박물관 입장료 등을 따지면, 책 내서 본전은 찾을까 싶을 정도다. 그러니 인세 때문에 '그리스 로마 신화' 책을 냈을리는 만무하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하고 대영 박물관은 못해도 한 200번 갔고, 파리 루브르도 한 15번 정도 간 것 같아요. 한 번 가면 살다시피 했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메타주 박물관도 보물창고거든요. 거기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가서 발 담그고 그리스와 터키까지. 최소한 4~5번은 그렇게 훑으면서 자료 수집했죠."

강남길 씨 스스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보고 느낀 벅찬 감동을 남들과 같이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가면 루벤스가 그린 '파리스의 심판'이 있어요.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가 등장하는데 그림이 엄청나게 커요. 들어가서 그 그림을 보자마자 갑자기 숨이 턱 막히더군요. 입장료도 무료예요. 근데 작품의 60% 이상이 그리스 로마 신화로 이뤄져 있거든요. 신화 미리 알아두고 가시면 박물관이며 유적지며 둘러보며 영국 오길 잘했구나라고 느끼실 거예요."

결정적으로, 생사를 오가는 큰 위기를 겪어내면서 책을 완성해야겠다는 의지가 더욱 굳어졌다. 강남길 씨는 자녀들을 보려고 영국에 머물던 중 달걀을 잘못 먹어 실핏줄이 터지는 바람에 병원 신세를 졌다. 별거 아닌 듯했지만 내출혈로 상태가 심각했다. 3주 이상을 입원해 치료를 받는 동안, 문병 온 아이들 앞에서 피를 토하기도 했다고. 이러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언까지 남겼을 정도다. 앞서 40대 초반에는 심근경색으로 쓰려져 촌각을 다툰 적도 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두 차례나 넘기니, 시작한 일은 마저 끝내고 싶은 바람이 절실해졌다.

"40대 그랬지, 50대 그랬지. 심장도 안 좋고, 제 위가 외벽이 거의 없다고 진짜 조심해야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계속 컴퓨터로 글을 쓰다보니 목 디스크가 와서 시술도 받았어요.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죠. 제 남은 인생을 생각하게 되더군요. 너무 헛되이 가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면서 철학이나 종교, 인문학 서적도 많이 보게 됐죠. 그러니 제가 남길 것이 무엇 있겠습니다. 평소 집필해 오던 이 이야기를 기필코 책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다고는 해도 14년의 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책을 완성했다니, 대단한 끈기가 아닐 수 없다.

"뭐 실력이 없으니까 오래 걸렸겠지만, 책을 매일 쓴 것은 아니고 촬영하면서 짬짬이 해 가지고 그렇게 걸렸어요. 다 쓰고 보니 7권이에요. 그럼 그걸 누가 보겠습니까. 그래서 원고를 또 예쁘게 다듬고 정리하고 하는데 한 3년 정도 걸리고. 또 찍어 놓은 사진들이 화질이 안 좋아서 2번을 영국부터 터키까지 쭉 훑으면서 다시 찍고. 그리고 책을 내려고 보니까 애들이 이젠 '유튜브 시대'랍니다. 다시 동영상을 찍으러 여름에 두 달 동안을 돌고 오니 팬데믹이 딱 온 거예요. 작년에 낼까 기회를 보니 오미크론이 난리고, 11월에 낼까 했더니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룬 방송 프로그램이 새로 나오더라고요. 이래 저래 미루다 보니 14년이 걸렸네요."

말그대로 피까지 토하며 쓴 책이니, 토씨 하나에도 애틋함이 묻어 날 수밖에 없다. 책이 나왔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펑펑 울었다고.

"12월 23일인가 24일에 책을 받았어요. 저는요, 펑펑 울었어요. 펑펑 울고 있는데 우리 딸은 '아빠!' 하고 뛰어나와서 같이 기뻐해 주는데, 우리 아들은 책을 딱 들고 보더니 '음 잘 나왔네' 그러고 끝이더라고. 하하. 부족하나마 나름대로 그래도 최선을 다 썼거든요. 최소한 남한테 읽으라고 줬을 때 부끄럽지는 않은 책입니다."

14년을 두고 준비를 했으니 찍어둔 사진과 동영상만 해도 양이 어마어마하다. 책에 미처 다 담지 못한 사진과 영상이 아까워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를 통해서라도 공개할 참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사진을 제가 한 3만 장 가지고 있어요. 동영상은 2500편. 책 3권에 사진 1500장 들어갔거든요. 그러니 10분의 1도 못 쓴 거예요. 요즘은 영상을 보는 추세니까 많이 좀 보여주자는 취지에서 유튜브도 준비했어요. 제가 학원 다니고 책도 사고 해서 편집하는 법도 배웠어요. 80%는 제가 다 해요. 사실은 한 2~3주 전에 찍어서 올리려고 그랬더니 우리 아이들이 딱 보고서 너무 길대. 1월 1일에 두 애들이 와서 제가 검수를 좀 받았거든요. 나더러 꼰대래요. 젊은 세대들이 어려운 신화를 쉽게 접하게 하자는 취지인데 아빠가 혼자 막 떠든다고. 20여 분 되는데 한 5분으로 줄이라네요.(웃음)"

이번 책의 시작과 끝에는 두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과 함께 영국에 가면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접했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아이들과 새벽 통화를 기다리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다. 아빠가 책을 내고자 했을 때 두 자녀가 적극적으로 지지해 줬고, 표지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편집까지 도맡았다. 보이진 않지만 그의 책에는 아이들과 함께 한 지난 세월이 녹아있다. 14년 전 어렸던 아이들은 이제 장성해,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87년 생인 딸은 올해 결혼도 앞두고 있다.

강남길 씨는 "표지부터 시작해서 안에 글과 사진까지 다 아이들이 편집을 했어요. 저에게는 이 책 자체가 추억"이라고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최신 스마트폰을 꺼내 들더니 "아이들이 독자들이랑 소통하라고 화면이 큰 것으로 핸드폰도 바꿔주고 인스타그램 어플도 다 깔아줬어요"라면서 자랑하기도.

사실 강남길과 그리스 로마 신화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책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98년 'TV보다 쉬운 컴퓨터'라는 책을 발간해 50만 부 이상 팔리는 히트를 기록한 바 있다. 2004년 귀국했을 때는 영국 생활 중 느낀 것들을 담은 '오! 마이 고드'를 출간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컴퓨터나 영국 문화와는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가 연기한 '한지붕 세가족'의 봉수, '베스트극장'의 달수가 공감가는 연기로 시청자의 마음을 울렸듯이, 글은 그가 대중과 소통하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서양 문화이기 때문에 우리야 알아도 몰라도 그만이죠. 근데 요즘 K팝이 세계화되면서 우리 문화가 알려졌잖아요. 지금도 제가 영국에 자주 가는데 한국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오세요. 한국말이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 오잖아요. 그러면 조각상을 보고 '왜 발가벗고 있냐. 남사스럽다'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해요. 안타까웠어요. 영국부터 터키까지 유럽 박물관이나 유적지 작품 50% 이상은 그리스 로마 신화예요. 모르고 가면 그림은 차치하더라도 조각상은 그냥 돌덩이에 불과하죠. 돈 들여서 여행 갔는데 알고 가시면 훨씬 마음에 남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요? 97년에 컴퓨터 책도 처음에는 쓰기 싫었는데, 쓰고 보니 사람들이 많이 봤나 봐요. 지금도 '저 옛날에 그 컴퓨터 책 보고 배웠어요'라고 하시면 참 보람 돼요.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화'도 재밌게 봐주시면 여행을 가셨을 때, 아니면 영화 볼 때라도 도움이 되면 저를 생각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죠."

이토록 처절하게 책을 냈으니, 쓰면서도 몇 번이나 "이제 절대 안 써!"를 되뇌었다는 강남길 씨의 마음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그런데 막상 책이 나오고 보니 다 못 담은 이야기들에 슬그머니 아쉬운 맘이 든단다. 아무래도 몇 년 안에 그의 이름을 서점에서 다시 만날 듯하다.

"진짜 절대로 책 다시 안 쓴다고 그랬는데, 끝나고 나니까 빠진 내용들이 좀 아쉬워요. 7권 분량을 3권으로 줄이면서 많이 빼야 했거든. 사실 내가 가장 꽂힌 부분이 도자기 그림이거든요. 유적지 이야기도 있고. 그런 내용들 엮어서 한 두 권 정도 더 내면 어떨까... 내가 책 나오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 했어요. 근데 올해 우리 딸이 결혼하거든요. 아, 그래도 손주는 봐야지 싶은 거예요. 딱 그런 맘인 거지. 하하하."

YTN star 최보란 (ran613@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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