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전기차·반도체’ 그 다음은?…‘바이든표 무역’ 디자이너가 본 2023

이정민 2023. 1.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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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기차·반도체 옭아맨 미국 무역정책, 어디서 나왔나?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아직 대통령 후보이던 2020년 9월, 미국의 싱크탱크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이 82쪽짜리 보고서 하나를 발간합니다. 제목은 '중산층에 더 적합한 외교정책 만들기'. 미국 민주당 계열의 외교·안보와 경제 브레인이라 꼽히는 11명이 공들여 작성한 보고서인데, 작성자 중 상당수가 현재 미국 정부 고위직을 맡고 있습니다. 대표적 인물이 바이든 정부의 안보 정책 사령탑인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입니다.

보고서는 바이든 대통령의 당선 이후 미국 정부의 외교·안보정책 방향을 제시한 초안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실제 2년 뒤인 지난해 10월, 미국이 발표한 <국가안보전략>의 내용도 이 보고서와 많이 겹칩니다. 미국의 중심인 중산층의 이익에 미국 외교가 봉사해야 하고 그래서 무역과 외교 전략이 한 묶음이 돼야 한다는 방향,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경제적 패권을 쥐려는 시도를 막는 게 미국의 중산층에도 도움이 된다는 의제 등이 그것입니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 보고서 ‘중산층에 더 적합한 외교정책 만들기’(좌)와 바이든 정부의 ‘국가안보전략’ (우) 표지


이 보고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미국의 외교 정책이 그 뒤 어떻게 작용했는지, 우리는 이제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중국을 배제한다는 이유로 북미산 전기차에만 혜택을 주느라 한국산 전기차가 낭패를 입게 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Inflation Reduction Act), 미국제 첨단 반도체 장비를 중국에 반입해선 안 된다고 발표해 한국 반도체 업계를 우왕좌왕하게 만든 규정들이 그 결과물입니다.

동맹에 피해를 줄 생각은 없었다는 게 미국 입장이지만, 해가 바뀌어도 파장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올해는 또 어떤 분야로 미국의 정책이 이어질지도 지켜봐야 합니다.

■ 보고서 만든 웬디 커틀러의 진단…"美 보호무역주의 의도 아냐"

웬디 커틀러 미국 무역대표부 전 부대표(현 아시아소사이어티 부회장)는 이 보고서 작성자 중 한 명입니다. 오랫동안 미국 무역정책의 변화를 지켜본 인물이고, 무엇보다 11년 전 발효된 한미 FTA의 주역입니다.

IRA 같은 법안은 엄밀하게 말하면 한미FTA에도 어긋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FTA와 미국의 현재 경제안보 정책 모두를 '디자인'한 커틀러 전 부대표의 견해를 인터뷰를 통해 들어봤습니다. 커틀러 전 부대표와의 KBS 인터뷰는 바이든 정부의 경제안보 정책 취지를 묻는데서 시작했습니다.

Q. 2020년 작성된 '중산층 보고서'를 토대로 한 미국의 경제안보 정책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요?

▶ 웬디 커틀러 (미 무역대표부(USTR) 전 부대표·현 아시아소사이어티 부회장)

"바이든 정부에서 다수가 고위직에 오른 그룹의 일원이었다는 건 영광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국내 정책과 국제 정책을 한데 바라보는 관점을 취했고, 둘을 가깝게 연결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바이든 정부가 실제 구현한 그 보고서 중 일부는 국내에서 경쟁력을 높이고, 동맹 및 우방과는 가깝게 협력하고, 그래서 마지막엔 미국이 세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게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걸 미국인들에게 설득하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Q. 이 보고서가 담은 내용이 사실은 '보호무역주의'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 보고서가 '보호무역주의'로 불리는 건 옳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 현실적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에서 70년간 기능한 다자간 규칙에 기반을 둔 무역 시스템이 지금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 말입니다. 또, 이 시스템이 모두가 상상했던 결과를 생산하고 있는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그리고 미국 입장에선 우리가 규칙을 지킬 때 중국은 안 지킨다든가, 경제 분야에서 중국의 행동을 바로잡지 않는 느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내에선 이 제도가 소득 불평등을 조장했다는 생각도 있고요. 그래서 현상 유지는 더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 하고, 그게 바이든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한국을 포함한 우리의 무역 파트너들이 놓인 몇 가지 조치가 좋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바이든 정부가 동맹 및 우방과의 신뢰와 관계를 재건하고, 우리의 공동 이익을 증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웬디 커틀러 미 무역대표부 전 부대표(아시아소사이어티 부회장) (촬영=KBS)

Q. 미국이 취한 '좋지 않은 조치'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광범위한 분야에서 무역 상대국들과 문제가 있었어요. 특히 디지털 분야에서, 디지털 세금을 고려하는 국가들과요. 특히 한국은 디지털 영역과 클라우딩 컴퓨팅에 제한을 가하는 여러 정책을 시행하거나 고려하고 있죠.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무역이나 투자 규모가 큰 두 국가들 사이에선 문제가 생기게 될 겁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문제가 확대되거나 관계 전체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미 간에는 그런 일들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왔다고 봅니다. 한미 FTA 체결 이후 미국은 수년간 한국의 행동을 우려해왔지만, 분쟁이 있더라도 끝까지 가진 않았어요. 함께 테이블에 앉아 차이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지금 한국뿐 아니라 몇몇 다른 미국의 무역 상대국들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그 법의 일부 차별조항, 특히 전기차에 대해 우려하는 걸 압니다. 미국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접점을 찾고자 한국은 물론 유럽, 일본과도 협의 중입니다."

Q. 한국산 전기차를 차별한 IRA 같은 일이 또 생길 것을 한국은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 번에 한 걸음씩 해야 할 것 같아요. 당장은 한국과 유럽, 다른 무역상대국들의 우려를 이해하고 시행규정을 만들 때 뭘 할 수 있는지, 혹은 이와 유사한 걸 할 수 있는지에 양측이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리고 합의에 도달한다면, 그걸 향후에도 적용할 수 있겠죠."

커틀러 전 부대표는 WTO(세계무역기구) 체제가 약화된 것과 달리, "한미 FTA는 여전히 강력하며, 한미 간의 분쟁이 생길 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한미 FTA 위배요소가 있다고 해석되는 한국산 전기차 차별조항을 개선하는 데 한미FTA가 향후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 미, '중국 배제' 어디까지?…'광물·의약품·양자컴퓨팅'

미국이 주요 무역 상대국과의 분쟁을 감수하면서까지 밀어붙이는 정책들은 모두 중국을 의식한 것입니다. 미국을 방문했던 한국의 많은 대기업 관계자들에게 물어보면 '미·중 간 경쟁이 치열해질 경우 결국 첨단 기술이 있는 미국에 더 무게를 두게 되지 않겠냐'고 직간접적으로 속내를 얘기합니다.

문제는 미국이 과연 어디까지 중국과 선을 그으려고 하는지가 아직 불명확하다는 겁니다. 불확실성이 길어지면 섣불리 대미, 대중 투자를 결정하기 힘든 여건이 조성되고, 그만큼 기업엔 부담입니다.

지난해 11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SK실트론CSS 공장을 방문해 반도체 소재와 관련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AP)

Q. 미국은 무역에서 중국을 어느 정도까지 배제하려 할까요?

"저는 미국이 우리가 중국과 경제적·상업적 분리를 추구하는 게 아니고, 작은 마당 주변에 높은 울타리를 세우려 한다는 걸 중국이 분명히 알고 있다고 봅니다. 미국과 미국의 동맹·우방국의 안보에 영향을 미칠 기술들을 찾고 그런 기술과 관련한 중국에 대한 대응을 함께 조정하자는 거예요. 중국과 완전히 강력한 디커플링을 추구하자는 건 아닙니다."

"오늘날, 그건 반도체죠. 다음 기술은 뭐가 될지 아직은 찾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에 있어요. 이젠 특정 기술이 군사적 목적, 혹은 상업적 목적에만 쓰인다고 말할 수 없어요. 상업적, 군사적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다른 나라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특정 핵심 기술의 수출을 제한할 필요성을 미국뿐 아니라 동맹국들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요."

"(미국이 앞으로 주목할 분야는) 주요 광물들, 특정 의약품들, 그리고 양자컴퓨팅 같은 것일 거예요. 반도체 같은 전반적 기술 발전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분야거나 군사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는 진보된 분야들에 미국이 초점을 맞출 거예요."

■ "한국과 청정 기술·에너지 전환 등 협력 원해"

미국이 자국 투자를 늘리라고 압박하고 중국 투자에 대해선 제약을 가하면서 한국 기업들의 고민도 늘고 있습니다. 한국으로선 국내기업의 일자리를 미국에 뺏길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웬디 커틀러 미 무역대표부 전 부대표(현 아시아소사이어티 부회장)가 KBS와 인터뷰하고 있다. (촬영=KBS)

Q. 한국에선 미국이 중국 투자를 막을까 우려도 있고, 다른 한편에선 대미 투자가 늘면 한국 내 일자리가 줄어들 것에 대한 걱정도 나옵니다.

"두 가지 우려를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투자와 관련해서는 한국도 미국 내 투자가 늘었지만, FTA 하에서 미국의 한국 내 투자도 늘었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투자하고 있죠. 그래서 만일 한국이 일자리 감소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면 그건 한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고, 어떻게 한국에 더 많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더 나은 무역 관계를 위해 한국과 미국이 서로 뭘 해야 할까요?

"한미 간 경제 관계는 먼 길을 걸어왔고, 크게 진전됐다고 생각합니다. 강력한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고 더 강화될 수 있다고 봐요. 한국과 미국은 함께 일하고 새로운 기술 표준을 만들 수 있으며, 청정기술과 에너지 전환을 함께 연구할 수 있습니다.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같은 분야에서는 많은 보완적 관심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향후 양자 간, 지역 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더 많은 협력을 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고요. 기술 표준이나 기후 관련 문제에 대해서는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협력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좋든 싫든 미국의 변화 방향은 분명합니다. 동맹을 생각하겠다지만 올해도 자국의 이익을 지키고 중국을 방어하기 위한 움직임은 계속될 것입니다. 문제가 또 생긴다면 풀린다 해도 또 시간이 걸릴 겁니다. 미국이 새로 짜는 무역의 판이 우리 경제에 미칠 추가적 영향도 없을 수 없습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경제 안보 정책을 펴나간 지난해, 우리 정부와 기업은 미국의 정책이 나오면 그때그때 일단 막기에 급급했습니다. 미국의 변화를 큰 그림에서 파악하고 선제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지난해와는 달라진 모습이 올해는 필요할 겁니다.

[연관 기사] [ET] 새해 첫날부터 IRA 홍보한 바이든…美 보호무역 벽 더 높일까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6782420
https://news.kbs.co.kr/special/danuri/2022/intro.html

이정민 기자 (mani@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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