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소녀’…“평범한 삶이 가장 어렵다”
디오르 백을 메는 엠제트(MZ) 무당.
11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시간을 꿈꾸는 소녀>의 주인공 권수진(26)씨는 평범한 또래들처럼 꾸미는 데 관심이 많은 청년이지만 집에 돌아오면 따뜻한 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신에게 먼저 인사한다. 무속인으로 살아간 지 20년 넘는 시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온 일이다. 어린 시절 내내 벗어나고 싶었고, 열아홉살 때 서울로 대학을 가면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잠깐 생각했지만 결국 받아들인 자신의 운명. <춘희막이>의 박혁지 감독과 7년에 걸쳐 완성한 <시간을 꿈꾸는 소녀>는 운명과 선택에 관한 영화다.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죠. 너무 어릴 때 일이라 기억이 안 나니 후회를 할 수도 없고.” 지난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가회동 한 카페에서 만난 수진씨는 무속인의 길을 가게 한 어린 시절의 선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기 때 아버지의 이혼으로 할머니 이경원(76)씨에게 맡겨져 자랐다. 충남 홍성 산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무녀로 살아온 할머니의 손님들에게 꼬마 수진이는 자신에게 보이는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고 할머니는 ‘아이에게 물어보지 마세요’라는 글을 벽에 써 붙였다고 한다. 손녀만은 덜 힘들게 남들처럼 자라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여섯살 즈음에 아이는 저걸 떼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고 그게 운명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됐다.
영화는 수진씨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때부터 담았다. 산속 한파에 꽁꽁 언 보일러를 할머니와 함께 녹이고 교복 차림으로 친구들과 졸업사진을 찍으며 대학수학능력시험 날 긴장감을 숨기지 못하는 평범한 10대다. 물론 그때도 그는 ‘산속 애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홍성군의 유명 인사였다. “9살 때 처음 티브이에 나왔어요. <진실게임>(SBS)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진짜 무속인을 찾아라’라는 내용이었는데, 제가 방송국에 전화를 했어요.” 평범하지 않은 아이의 평범한 호기심은 그를 운명 속으로 점점 더 밀어 넣은 셈이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때인가, 학교에서 새만금으로 견학을 갔어요. 저는 그냥 친구들하고 김밥 먹고 재밌게 놀고 싶은데 관계자 아저씨들이 계속 쫓아오면서 점을 봐달라는 거예요. 너무 속상해서 돌아오는 내내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요. 사람들이 저만 보면 (자신이) 어떻게 될 거 같냐, 대통령·군수는 몇번이 될 거 같냐 물어보는 게 너무 싫어서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고 공부를 더 열심히 했던 거 같아요.”
한국외국어대 16학번으로 입학해 “친구 몇 명과 붙어 다니면서 떡볶이도 사 먹고, 남자친구 이야기도 하고 여행도 가는” 그런 꿈이 잠시 이뤄지는 것도 같았다. ‘과잠’을 입고 친구와 함께 명랑하게 발표 수업을 하는 대학생 수진이 화면에 등장하고 얼마 뒤 고향 집에서 할머니에게 무섭게 질타를 받으며 흐느끼는 무녀 수진이 등장한다.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아, 내가 벗어날 수 없겠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학번 대표까지 맡으면서 의욕적으로 학교생활을 시작했는데 모든 게 어긋나고 오해받고, 비난받는 상황이 된 거예요.”
서울과 홍성 집을 주말마다 오가며 두개의 삶을 병행하다가 심리적 과부하에 무너진 수진씨가 촬영 중단을 선언하며 카메라는 2년 넘게 버튼이 꺼져 있기도 했다. “주변에 나를 설명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팀 과제나 과 행사 같은 걸 참여하려면 주말에도 바쁜데 주말마다 내려와서 기도해야 했거든요. 신령님을 잘 모셔야 아프지 않고 학업을 마칠 수 있다는 할머니의 고집도 저를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어린 시절에는 외국어가 재밌어 외교관, 승무원을 꿈꿨고 대학에 들어갈 때는 미디어를 전공하며 광고기획이나 방송사 피디를 생각했지만, 이 시간을 보내며 “신 앞에 무릎 꿇으라는 신호를 받아들이니 다른 욕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 뒤 졸업을 위해 휴학 한번 없이 달려 “뭘 하든 손가락질받지 않으려면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켰고 학사 출신 “책 좋아하는” 무당이 됐다.
꿈꾸었지만 이루지 못한 평범한 삶. 수진씨는 상담 오는 이들에게도 “평범한 삶이 가장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한다. “입학, 졸업, 취직, 결혼, 육아, 은퇴로 채워지는 게 보편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정말 많거든요. 남들처럼 산다는 게 쉬운 거 같지만 가장 어려운 일인 거 같아요.”
그렇다고 모든 꿈을 포기한 건 아니다. 지난해 국가무형문화재 104호 서울 새남굿의 전수자가 됐다. 3년 더 공부해서 이수자 시험을 통과하는 게 목표다. 책 사는 걸 좋아해 매년 초에 1년치 읽을거리를 잔뜩 준비하는데, 나중에 아이들에게 책 기부를 하고 싶다는 장기 목표도 있다.
신의 목소리, 운명을 읽는다는 그에게 운명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고 했다. “운명을 외면할 수는 없어요. 시간이 걸려도 결국 주어진 길을 가게 돼요. 상담 오시는 분들 중에 자기의 길이 아닌 걸 고집하는 걸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따끔하게 이야기도 해요. 그런데 대부분 자기 운명이 어떤 건지 모르잖아요. ‘절대’라거나 ‘반드시’라는 벽을 세우고 자신을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운명은 절대적이지만 나 자신에게는 내가 쉽게 넘나들 수 있는 정도의 벽을 만들어야 돌아올 수도 있고 방향을 조정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야 덜 상처받고 덜 힘들어요.”
한시간여 인터뷰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저녁은 먹고 오냐, 기다려서 같이 먹을까, 차 조심해라 말하는 평범한 할머니와 평범한 손녀가 거기 있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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