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마지막 보물 창고 미지의 바이오·에너지 자원 발굴 기대 북극 해빙 녹아가며 항로 가치도 높아 기후변화 파급력·경제안보 중요성 커 美·中 등 대대적 투자… 패권경쟁 양상 韓, 극지 활동 진흥계획 마련 1만5000t 차세대 쇄빙선 2027년 띄워 亞 최초 북극해 국제공동연구 주도 구상 2030년 세계 6번째 남극 내륙기지 구축 “국제 거버넌스 전문가 양성 필요” 지적도 연평균 21% 늘어… 주요 18개국 중 1위 선도국보다 30년 늦었지만 바짝 추격 해빙 두께 추정 기술 등 연구개발 두각
“‘극지 선도국가’로 도약해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전 지구적 해법을 제시하겠다.”
조승환 해양수산부 장관은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북극협력주간’ 행사에서 극지 산업 육성과 연구 확대를 위한 정부 지원을 약속하며 이같이 말했다. 세계 무대에서 더 이상 극지 활동 추격자에 머무르지 않고 선도국으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다. 정부는 최근 극지 활동 전반을 아우르는 첫 법정 기본계획인 ‘제1차 극지 활동 진흥 기본계획’을 마련하기도 했다.
북위 30도대(서울 37도)에 걸쳐 있는 한국이 물리적으로 먼 남·북극에 이처럼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극지의 변화가 몰고 올 파급력이 한반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극지 기후변화 가속화와 함께 나타난 사회·경제적 여건 변화에 극지는 강대국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한 지 오래다. 한국도 극지 과학·산업 연구개발 확대와 더불어 양자·다자협력 등 극지 거버넌스 활동에 특화된 전문가 양성에 힘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장 장마·폭염 등 한반도도 극지 변화 영향권
11일 해양수산부 등에 따르면 극지는 기후변화와 수산·생명자원뿐 아니라 바이오, 에너지 등 경제·산업 분야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보유한 지역이다.
특히 극지는 기후변화의 영향에 가장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으로,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의 이상 기후 현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빙(海氷) 감소 등 북극에서 나타난 변화는 역대 국내 최장 기간 장마(2020년) 및 폭염(2018년)과 같은 한반도 이상 기상 현상과 직접 관련돼 있다. 극지는 향후 기후·환경변화 예측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극지에 잠재된 경제·산업적 가치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극한의 공간에서 진화해 온 생명자원을 활용한 바이오산업과 북극 해빙 감소로 접근성이 개선된 북극해 항로 및 에너지 자원 등이 대표적이다.
국민도 극지의 중요도와 필요성에 대해 상당 부분 공감하는 상태다. 정부가 최근 19세 이상 국민 1000명과 16∼18세 청소년 400명을 대상으로 각각 극지 관련 인식조사를 한 결과, 97% 이상이 ‘국가 미래에 극지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다만 극지 관심도 관련 조사에선 ‘60대 이상’ 71.7%에서 ‘40∼50대’ 67.9%, ‘20∼30대’ 55.9%, 미래세대(16∼18세) 44.6% 등 연령대가 낮을수록 관심도는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산업·안보적 중요성에 주요국 참여↑
극지 기후변화의 파급력과 경제·안보적 중요성을 인지한 주요국들은 극지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전략 수립에 나선 상태다.
미국의 경우 기후변화 연구와 동시에 안보적 관점에서 정책 수립 및 투자를 확대하고 있으며, 남극 등 극지해양과학 연구를 위해 연평균 약 5000억원을 투입하고 있다. 자국을 ‘근(近) 북극국가’로 규정한 중국은 극지 연구를 7대 전략기술로 선정하고, 연 7% 이상의 연구개발(R&D) 투자 확대를 시행 중이다. 일본, 독일, 영국 등도 극지 과학연구 활동과 함께 산업·안보 등의 분야에서 전략적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극지를 둘러싼 현안들이 글로벌 이슈로 부각되면서 북극이사회, 남극조약협의당사국회의(ATCM)와 같은 극지 거버넌스도 갈수록 중요해지는 추세다. 최근 북극에선 자원 확보와 군사안보적 이점 등에 대한 각국의 관심이 늘면서 갈등과 긴장도 표면화되고 있다.
현재 한국의 극지과학연구(해양·생명·지질·대기·빙하)와 극한공간 인프라 기술은 각각 최고선도국인 미국의 75% 수준으로 평가된다. 극지 신기술 중 극지 선박 디지털 시스템, 자율운항 선박, 무인 탐사 분야는 모두 최고선도국의 80% 수준이다. 또 극지 바이오는 18.8%, 극지 친환경 에너지는 88.7%의 기술 수준을 보유하고 있다.
◆“극지 거버넌스서 역량 발휘할 전문가 양성해야”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해 정부는 다양한 극지 전략들을 종합하고, 목표와 과제를 현실화해 지난해 11월 제1차 극지 활동 진흥 기본계획을 마련했다. 이번 계획에는 연구활동 외에도 극지 산업 기반 마련과 국제협력, 인식 제고 등 극지 활동 지원 체계 전반이 포함됐다.
정부는 1만5000t급 차세대 쇄빙 연구선을 건조해 2027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북극해 국제공동연구를 주도하고, 2030년에는 세계 6번째로 남극 내륙기지를 구축하는 등 극지 탐사를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북극 전역 해빙 변화의 실시간 관측을 위한 초소형위성 개발에 나서는 등 기후·환경변화 대응에도 나서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극지 선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기후변화 대응과 북극 원주민 보호 등 국제사회에서 촉구하는 사회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제·산업적 측면에서도 극지 환경 파괴 및 자원 고갈 가능성을 고려한 지속가능한 개발이 요구된다.
극지 거버넌스에서 정치·외교적 역량을 발휘할 전문가를 양성할 필요성도 나온다. 하호경 인하대 해양과학과 교수는 “극지 자원개발 등을 놓고 정치적·외교적으로 대립하는 국면이 많은데, 이를 담당할 전문가는 사실 많지 않다”며 “과학연구 분야를 넘어 극지 거버넌스에서 한국 중심으로 의제를 발굴할 전문가 양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하 교수는 “정부와 과학·산업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범정부협의체를 단발성이 아닌 장기적으로 운영할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후발주자 韓, 남·북극 논문 증가율은 세계 최고 수준
한국은 후발주자로 극지 활동에 나섰지만 연구활동 고도화로 세계 최초 연구 성과를 내는 등 극지 선도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11일 해양수산부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다른 극지 선도국보다 30년 정도 늦게 극지 활동을 시작했다. 1988년 남극 세종과학기지 건설을 기점으로 극지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한국은 2009년 우리나라 최초 쇄빙연구선 ‘아라온호’ 건조, 2013년 북극이사회 옵서버 지위 획득, 2014년 남극 장보고과학기지 건설 등을 거치며 극지 활동을 넓혀왔다. 정부가 18개국을 대상으로 2006∼2019년 남·북극 관련 논문 성과를 분석한 결과, 한국의 순위는 14위이나 연평균 증가율(20.6%)에선 1위를 차지했다.
국내 극지 연구 최전선에 서 있는 극지연구소는 최근 남·북극 관련 다양한 신기술과 세계 최초 연구 성과들도 도출해 내고 있다. 극지연구소 김현철 박사 연구팀은 북극 해빙(海氷)의 두께를 추정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지난해 10월 국제 학술지 ‘대기와 해양기술’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해빙이 두꺼울수록 해빙에서 방출되는 마이크로파가 더 긴 구간을 통과하므로 산란 정도가 강해진다는 점에 착안해 해빙 두께 추정 방법을 개발했다.
극지연구소 이원상 박사가 주도한 국제공동연구팀은 여름철 남극 해안가에서 발생하는 소용돌이가 바다 표층의 따뜻한 물을 빙붕 아랫부분으로 흘려보내는 과정을 세계 최초로 규명해냈다. 빙붕은 남극대륙 위에 놓인 빙하에서 이어져 바다에 떠 있는 200∼900m 두께의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바다 표면의 따뜻한 물이 어떻게 빙붕 아래로 흘러들어 가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었다. 해당 연구 결과는 지난해 6월 국제학술지 ‘커뮤니케이션스 지구와 환경’에 실렸다.
이외에도 극지연구소 김성중 박사 연구팀 등으로 구성된 국제공동연구팀은 지구온난화의 영향에도 남극 해빙이 늘어난 것은 자연 변동성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연구 결과를 지난해 국제학술지 ‘네이처 기후변화’에 게재한 바 있다. 정부는 앞으로 신규 연구 인프라 등을 통해 남·북극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사를 확대하고, 극지 빙하 및 해양퇴적물 시추를 통한 과거 기후 복원 자료 생산 등에도 나설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