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여성영화 진일보…재미·의미 다 잡은 수작 '유령'(종합)
미학적으로 세련되고, 스파이물로 신선하고, 일제강점기물로 변주를 꾀한 작품이 나왔다. 감독의 색깔이 뚜렷하고 강렬하게 빛난다.
영화 '유령(이해영 감독)'이 11일 서울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진행된 언론시사회를 통해 첫 공개됐다. '유령'은 1933년 경성, 조선총독부에 항일조직이 심어 놓은 스파이 유령으로 의심 받으며 외딴 호텔에 갇힌 용의자들이 의심을 뚫고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와 진짜 유령의 멈출 수 없는 작전을 그린 작품이다. 설경구 이하늬 박소담 박해수 서현우의 각개전투 케미가 돋보인다.
이해영 감독은 "스파이 장르로 이야기가 열리고 중반부 이후로는 좀 더 뜨거워지고 역동적인 느낌이 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체적으로는 캐릭터 무비로 보이길 원했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빛나고 배우들의 호연이 이야기의 구심점이 돼주고 개연성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했다"며 "원작 소설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번역된 적이 없어서 보신 분은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원작은 마이지아 작가의 소설 '풍성'이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땐 막막했다"는 이해영 감독은 "아무런 영감이 없어 고민이 되더라. 특히 원작 소설은 밀실 추리극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이야기 목표 지점이 유령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이다. 근데 그 플롯은 저를 별로 자극하지 못했다. '유령이 누구인가'를 궁금해 하는 이야기라면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 '반대로 생각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유령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재밌을 것 같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장 큰 차별점이다"고 설명했다.
이해영 감독의 말처럼 '유령'은 유령의 정체를 찾는 것에 주력하지 않는다. 그 목표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캐릭터도 존재하지만, 그 이면에는 캐릭터 각자의 목표가 확실하게 어필 된다. 영화적 재미를 바탕으로 관객들에게 살짝 살짝 혼선을 주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응원하고 있을 터. 근래 여성 캐릭터의 활용이 이토록 돋보인 작품도 손에 꼽힌다. 작품 안팎으로 박수를 부른다.
그 시작엔 백지의 점이 된 박차경 이하늬가 있다. 총독부 통신과 암호 전문 기록 담당으로 소개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사실상 이하늬에 의한, 이하늬를 위한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하늬는 "안에서는 마그마 같은 게 끓는데 겉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쿨톤의 캐릭터라 재미있었다. 차경이 '살아. 죽어야 할 때 그때 죽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죽기 위해 사는 '생즉사 사즉생' 캐릭터다. '죽음을 위해 사는 삶은 어떨지, 독립 투사들이 이런 마음으로 살았겠구나' 싶었다"고 털어놨다. 많이 애정한 캐릭터, 행복한 촬영이었다는 말도 보탰다.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 쥰지 역의 설경구와는 강도 높은 액션을 펼친다. 성별 구분 없이 무차별적으로 싸운다. "6개월 간 그 장면을 머리에 달고 살았다"는 이하늬는 "합을 맞춰 멋지게 보여야 한다기 보다 힘의 실랑이가 있어야 하는 신이라 트레이닝이 필요했다. '역도산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준비했다"며 설경구가 연기한 과거 캐릭터를 언급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하늬에 맞서야 하는 설경구의 노고도 만만치 않았다. 설경구는 "이하늬 씨 팔다리가 길어 오히려 내가 힘에 겨웠다. 난 기술이 없어서 힘으로 하는데 하늬 씨는 대단하더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해영 감독도 "'남녀 대결'로 보이지 않도록 풀어내는 것이 핵심이었다. 단 한 순간도 그렇게 접근 되지 않길 바랐고 '계급장 떼고 붙는다'는 말이 있듯 '성별 떼고 붙자'는 목표가 컸다. 막상 촬영을 할 땐 '설경구 선배님 괜찮으신가' 걱정이 들더라. 설경구가 역도산이라면 이하늬는 마동석이었다"고 귀띔해 좌중을 폭소케 했다.
웃음 만큼 눈물도 있다. 여성들의 연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울컥함이 존재한다. 이하늬와 박소담의 관계가 그랬다. 특히 '유령'은 이하늬에게는 출산 이후, 박소담에게는 갑상선유두암 완치 후 작품으로는 첫 복귀작이라 남다른 의미가 있다. 현장에서도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됐다. 박소담은 도발적인 매력을 무기 삼아 조선인임에도 총독부의 실세인 정무총감 직속 비서까지 오른 야심가 유리코로 관객까지 홀린다.
"케미가 좋았다"는 말에 깜짝 눈물을 쏟은 박소담은 "제가 이상하게 하늬 선배님의 목소님을 들으면 위안이 된다. 영화에서 차경과 유리코로 만났을 때도 그렇지만. 이하늬와 박소담이 만났을 때도 그렇다. 영화에서 차경이가 '살아'라는 대사를 하는데, 실제로도 당시 저에게 굉장히 필요했던 말이었다. 혼자 많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너무 좋은 사람을 만났다. 촬영하는 내내 선배님께 받았던 에너지가 너무 컸다.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예쁜 후배이자 동료의 진심에 이하늬도 눈물을 흘린 건 당연지사. 이하늬는 "이번 작품에서 처음 만났는데 살아 있는 기백이 너무 좋았다. 단단한 배우다. 누구를 만나도 단단하다. 카메라 밖에서는 살가웠던 친구가 연기에 들어가면 확 달라졌다. 동생이지만 존경스러운 부분이 많았다"고 다독였다. 이 과정에서 이해영 감독까지 돌연 눈물을 보이면서 간담회장은 순식간에 웃음과 눈물로 가득 찼다. 영화를 보면 더 더욱 이해되는 눈물이다.
이해영 감독은 "후반 작업을 하면서 영화를 10만 번쯤 봤는데, 이 영화에서 빛나는 모든 순간을 이 배우 분들이 다 감사하게 해주셨다. 어려운 장면을 많이 찍어야 했는데, 사실 박소담 배우는 몸 컨디션이 아주 좋을 때가 아니었다. 당시엔 그걸 몰랐다. 그래서 '극한까지 요구해 너무 많은 걸 시킨 건 아닌가' 싶어 눈물이 났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박해수는 '유령'을 잡기 위해 함정을 파는 경호대장 카이토로 분해 역대급 비호감 최고치의 열연을 펼친다. 박해수는 "일본인 캐릭터라 도전하기 어렵고 무서웠지만, 배우로서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올림픽을 준비하듯 최선을 다해 일본어 선생님과 밤낮없이 숙박하며 캐릭터를 만들었다. 감독님과 설경구 선배님, 다른 배우 분들도 자신감을 줘 믿고 연기할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통신과 암호 해독 담당 천계장을 연기한 서현우는 입체적 캐릭터들 사이에서도 가장 캐릭터적인 인물을 맛깔나게 표현한다. 체중 증량까지 감행하며 흡사 인간 뚱냥이가 된 그는 "우리 작품 안에서 해야 할 몫이 있다고 생각했다. 감독님과 그걸 조율하는 작업이 필요했다"며 "항일운동 속에서도 평범한 인물이 있지 않았을까. 꽤 이기적이고, 그 시대를 살아내기 바쁜 평범한 인물도 있을 것이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장르와 극의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하지만 어느 정도 숨통은 트일 수 있는 인물로 그려봤다"고 설명했다.
작품 전체의 미장센부터 단도직입적인 메시지, 따로 또 같이의 케미에 각 캐릭터 별 디테일한 1mm까지 뜯어보고 싶은 맛이 확실한 '유령'은 18일 설 연휴 관객들과 만난다.
조연경 엔터뉴스팀 기자 cho.yeongyeong@jtbc.co.kr (콘텐트비즈니스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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