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아직 숙지하지 못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내용을 아직 숙지하지 못했다”고 말했을 때 귀를 의심했다. 전날 문화체육관광부의 특정 감사 결과 발표로 미술관이 발칵 뒤집힌 10일 신년 기자 간담회 질의응답 자리였다. 윤 관장은 감사 지적에 대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외부의 제3자나 구사할 법한 화법이다. “채찍과 격려로 알겠다” “미술관 운영의 자산으로 삼겠다”고 했지만 기관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하는 최소한의 사과도 없었다. 미술계를 우습게 보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태도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그간 미술관의 황당 백태(百態)에도 미술계는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뒤에서나 수군거릴 뿐, 흔한 성명서 등의 결기조차 내보인 적이 없다. 그러니 윤 관장이 그럴 만도 하다.
감사에서는 위법·부당 조치 16건이 적발됐다. 회계 문란, 관리 미흡, 갑질 등 분야도 다양했다. 이번 감사가 미술계의 내밀한 파악 없이 피상적 접근에 그쳤다는 의견도 나온다. 그런데도 이 정도다. 특히 1년 내내 미술관을 뒤흔든 갑질 사례를 접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미(美)를 앞세운 조직에서 “나가서 딴소리하면 죽여” 같은 폭언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문체부는 “관장은 이를 인지하고도 안일한 태도로 일관해 조직 전반에 불신이 팽배하다”고 밝혔다. 이날 윤 관장은 “갑질이라는 단어가 없는 미술관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모순이다. 직장 내 괴롭힘 건으로 징계 처분이 결정된 신임 학예실장 내정자를 윤 관장은 곧 임명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해당 내정자는 음주 운전 전력은 사과했지만 부하 직원의 갑질 신고에 대해서는 끝까지 반발했다. 뭐가 억울한지 입장을 들으려고 수차례 연락했지만 응하지도 않았다. 도덕성 논란이 일면서 최종 합격 후 5개월간 임명이 미뤄졌던 이 내정자는 곧 전시를 총괄하는 중추적 역할을 맡는다. 윤 관장은 공개 채용 행정 절차상의 정당성을 설명하며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음 수순을 밟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로써 미술관은 갑질이라는 단어를 계속 꼬리표로 달게 됐다.
미술관 내 전시 기획자들은 난처하게 됐다. 집안 꼴이 이토록 어지러운데 어떻게 인간의 아름다움과 같은 고매한 가치를 쉽게 운운할 수 있겠는가. 얼굴이 뜨거울 것이다. 미술계는 좁은 곳이다. 해외 기관끼리도 긴밀히 연결돼 있다. 나라 망신이다. 국립 미술관에서 일어나리라 예상할 수 없던 일들을 이미 지난해 수차례 목도했다. 그때마다 어물쩍 넘어가려고만 했다. ‘이건희 컬렉션’의 이중섭 그림이 한 달 넘게 거꾸로 걸려도, 심지어 미술관 유튜브 계정이 해킹당해도 관장은 본부에 보고도 하지 않았다.
한국 미술 시장의 수준과 규모는 어느 때보다 성장했다. 그런데 대한민국 유일의 국립 미술관은 뒤로 가는 모양새다. 이 후퇴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아직 숙지하지 못했다”는 대답이 더는 용납돼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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