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대통령의 ‘반도체 올인’
반도체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관심과 애정은 각별하다. 동원 가능한 인적·물적 자원을 반도체에 쏟아붓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새해 벽두부터 반도체 투자 세액공제 확대 방안을 꺼내들었다. 반도체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대기업은 8%에서 15%로, 중소기업은 16%에서 25%로 늘리는 것이 골자다. 방안대로라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은 앞으로 매년 수조원의 세금을 추가로 절감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백년대계라는 교육 정책도 반도체 연구·생산 인력 확대에 초점을 맞췄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 6월 국무회의에서 “반도체는 국가안보 자산이자 우리 산업의 핵심이고, 교육부의 첫 번째 의무는 산업 발전에 필요한 인재 공급”이라고 역설하자 교육부는 한 달 만에 부처 합동으로 반도체 인재 양성 방안을 내놓았다. 향후 10년간 반도체 인재 15만명을 육성하고 대학의 반도체 관련 학과 정원을 2000명 늘리기로 했다. 특히 그동안 엄격하게 정원이 통제된 수도권 대학에서 1300명의 증원을 허용했다. 학과를 신증설하려면 교원과 건물, 땅, 수익용 재산 등이 필요한데 반도체학과는 교원만 확보하면 가능하도록 예외를 뒀다.
윤 대통령이 대권 주자 시절 혼자서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를 찾아간 일화는 유명하다. 지난해 광복절에 윤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특별사면한 것도 반도체 때문이다. 중대범죄를 저지른 재벌 총수를 풀어주는 것은 공정과 정의에 반하는 일이지만 윤 대통령은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과거 중화학공업 시대에 철강이 산업의 쌀이었다면 제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시대에는 반도체가 중심이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스마트폰, 정보기술(IT), 온라인 플랫폼 구축 등 반도체가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 한국 업체들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20%에 이른다. 반도체는 명실상부한 한국 제조업의 근간이고 경제 안보의 핵심이다. 윤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첫 만남도 세계 최대 규모 반도체 생산기지인 삼성전자 평택사업장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경제는 늘 선택의 문제에 봉착한다. 쓸 곳은 많지만 재원이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의 반도체 우선 정책은 반도체 외 분야의 투자 축소나 포기를 의미한다. 반도체 기업의 세금을 깎아주면 당장 그만큼 나라 곳간이 비어 어디선가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국가의 자원 배분에 관한 사항을 결정하면서 기획재정부 의견도 무시했다.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반도체 세액공제는 세계 최고 수준이어서 절대 낮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 지시로 급조된 ‘반도체 등 세제지원 강화 방안’을 담은 세법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반도체 인재 양성 대책도 부작용이 크다.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학과 입학 정원이 늘면 지방대는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수도권 집중은 환경오염과 지방소멸, 부동산 가격 상승, 저출생의 원인이다. 반도체 경기 침체로 기업들이 고용을 줄이면 5~10년 뒤엔 반도체 인력의 대량 실업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반도체 기업들은 윤 대통령의 관심과 애정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럽다. 설비 투자나 인력 채용은 어디까지나 시장 전망과 자금 상황 등을 감안해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일인데 정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다그치지 않아도 반도체 산업에는 이미 엄청난 규모의 국가 자원이 투입되고 있다. 한국 경제는 세계 반도체 경기 사이클과 불가분의 관계다. 최근 경제위기는 한국이 주력인 메모리반도체 가격이 하락하고 중국 등지로 반도체 수출이 부진한 탓도 있다. 주식투자 격언에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라는 말이 있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철도나 철강 산업은 전 세계적으로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한국의 산업지형은 건설에서 시작해 무역, 섬유, 자동차, 반도체 등으로 중심이 이동했다. 한때 미국에서는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은 것’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미국의 자동차 회사 GM처럼 2023년 한국에는 반도체 기업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다. 이들 기업에 좋은 것이면 한국에도 좋은 것일까. 반도체 시장이 앞으로도 급신장세가 유지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대한민국 최고경영자(CEO)로서 윤 대통령의 ‘반도체 올인’ 정책은 속도 조절과 분산이 필요하다. 윤 대통령은 미래에서 온 재벌집 막내아들 도준이가 아니다.
오창민 논설위원 risk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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