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도심 쿠르드족 저격 사건, 불안에 빠진 佛 이주민 사회[글로벌 현장을 가다]

조은아기자 2023. 1. 1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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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8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10구의 쿠르드족 문화센터 앞에 추모객과 취재진이 모여 있다. ‘10년이 지나자 튀르키예 정부가 다시 파리에서 우리의 친구 3명을 살해했다’는 문구와 희생자들의 사진이 담긴 현수막이 걸려 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조은아 파리 특파원
“나흘 전만 해도 이곳에서 저와 포스터를 만들던 친구가 이렇게 가버렸습니다.”

지난해 12월 28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10구 쿠르드족 문화센터 앞에서 만난 쿠르드족 이주민 유누스 시섹 씨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친구를 비롯한 쿠르드족 이주민 3명은 같은 달 23일 쿠르드족 문화센터 근처에서 69세 프랑스 남성이 난사한 총에 맞아 숨졌다. 문화센터 벽 난간에는 희생자 3명의 영정 사진이 놓였고 그 옆으로는 조의를 표한 사람들이 가져다 놓은 꽃과 편지들이 쌓여 있었다. 무장한 파리 경찰 몇 명도 또 다른 총기 난사를 대비하는 듯 주변에서 경계를 섰다.》


파리 한가운데서 평일 대낮에 벌어진 총격 사건은 프랑스 사회에 큰 파장을 낳았다. 더구나 ‘윌리엄 M’으로 알려진 용의자가 과거 이민자 텐트를 공격하는 등 인종차별주의자로 알려지자 파리 이민자 사회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프랑스 사법 당국은 이번 사건을 인종혐오주의자가 저지른 범죄로 보고 있지만 프랑스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 이주민들은 “쿠르드족을 겨냥한 테러”라고 주장한다. 시섹 씨도 “이번 사건은 단순한 인종혐오범죄가 아니라 (쿠르드족을 탄압하는) 튀르키예가 쿠르드족을 공격한 테러”라고 강조했다.
파리 도심 쿠르드족 ‘임시정부’

지난해 12월 23일(현지 시간) 살해된 희생자들의 사진과 추모객들이 남긴 꽃다발이 프랑스 파리 10구 쿠르드족 문화센터 앞에 놓여 있다.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쿠르드족 문화센터는 국가 없이 떠도는 세계 최대 유랑민족 쿠르드족에게는 일종의 ‘임시정부’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문화센터 측 허락을 받아 들어가 보니 내부 홀 벽에는 쿠르드족 독립을 위해 투쟁한 인사들의 사진이 일제강점기 한국인 독립투사들처럼 걸려 있었다. 쿠르드족 이주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쿠르드어로 진지하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튀르키예 등에서 쿠르드 독립정부 수립을 꾀하다 탄압을 받고 도피한 정치적 난민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쿠르드족 출신이라는 프랑스인 바란 군두즈 씨는 “이곳에서는 쿠르드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문화 행사와 정치 활동이 종종 열린다”고 말했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쿠르드족은 주로 튀르키예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중동 지역에 분산돼 살고 있는 이란계 민족이다. 유랑민족이라 공식 통계를 잡기는 어렵지만 전체 인구는 약 3000만∼4500만 명이다. 이 중 튀르키예에 가장 많은 쿠르드족(약 1500만∼2000만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동 지역을 지배하던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패전해 소멸하면서 중동 곳곳에 흩어져 있던 쿠르드족에서도 독립국가를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가 발흥했다. 하지만 그들이 거주하는 해당 국가 정부로부터 대량학살 같은 핍박을 당하면서 분리 독립은 번번이 좌절됐다.

특히 쿠르드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튀르키예 정부는 쿠르드족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독립운동을 억제하고 있다. 쿠르드족 문화센터에서 만난 쿠르드족 이주민들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튀르키예를 집권한 뒤 우리에 대한 공격이 매우 심해졌다”고 입을 모았다. 튀르키예 헌법재판소가 이달 5일 친(親)쿠르드 성향 인민민주당(HDP)에 대한 정부 지원금 동결을 결정하는 등 쿠르드족 독립 불씨조차 꺼트리는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생명 위협 속 쿠르드 독립운동”

프랑스에 이주하거나 망명해 살고 있는 쿠르드족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파토스 족순투르 유럽 쿠르드족총협회 공동회장은 기자와 만나 “우리는 끊임없이 위협받으며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며 “4년 전에는 독일에서 활동하다 튀르키예 정부 비밀요원이 보낸 암살자에게 쫓겨 다니는 등 유럽 곳곳에서 암살 조직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10년째 프랑스에서 독립운동을 비롯한 쿠르드족의 각종 소식을 전하고 있는 쿠르드족 출신 기자 셀마 아카르 씨는 긴장한 표정으로 “나는 기자이지만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당신이나 다른 기자들처럼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취재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번 총격 사건이 쿠르드족을 겨냥한 잇단 테러 중 하나라고 강하게 믿고 있어 더욱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쿠르드족 문화센터에는 이번 총격 사건 희생자 말고도 2013년 1월 9일 역시 파리에서 살해된 3명의 쿠르드족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 중 한 명은 튀르키예가 테러 단체로 분류한, 쿠르드족 분리독립 조직 쿠르드노동자당(PKK) 핵심 인물로 알려졌다. 10년 전 총격 사건은 범인이 뇌종양으로 숨지면서 그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쿠르드족 이주민들은 진상 규명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지만 실체는 오리무중이다.

쿠르드족은 “튀르키예가 3명을 살해한 지 10년 만에 또 테러를 했다” “유독 쿠르드족만 희생되는 건 우리를 겨냥한 테러란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나는 쿠르드인이다’란 해시태그를 앞세운 진상 규명 촉구 글들이 이어지고 있다.
불안해하는 佛이주민 사회

프랑스 사법당국은 쿠르드족 이주민들 주장과는 달리 테러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는 분위기다. 외국인 혐오범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얘기다.

프랑스24 방송과 AFP통신 등에 따르면 프랑스 검찰은 사건 직후 용의자 ‘윌리엄 M’이 2016년 집에 도둑이 든 이후 병적으로 외국인 혐오가 생겼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백인 남성인 이 용의자는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고 총격 사건을 일으킨 날도 마지막 남은 총알로 극단적 선택을 할 계획이었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그는 당초 이민자가 많은 파리 북부 교외에서 범행을 저지르려 했지만 범행 당일 그곳에 인적이 거의 없어 쿠르드족이 많이 모여 사는 파리 10구로 장소를 옮긴 것으로 검찰은 파악하고 있다.

윌리엄 M의 아버지는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아들은 미쳤다”면서 평소에는 조용하며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말했다. 윌리엄 M이 사건 직후 체포된 뒤 정신건강과 시설에서 하루를 보낸 뒤 경찰에 연행됐다.

이번 총격 사건을 인종 혐오 범죄라고 보는 파리 시민도 적지 않다. 쿠르드족 문화센터 길 건너편 미용실에서 만난 튀르키예인 에밀 소파 씨는 “이번 총격 사건은 정말 슬프고 안타깝다”면서도 “용의자는 외국인 혐오주의자여서 범행을 저지른 것이지 튀르키예가 저지른 테러는 아니다. 나중에 경찰이 조사하면 모든 게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이주민 사회는 인종 혐오 범죄일 가능성이 크다는 보도를 접하고 한동안 뜸하던 이민자 대상 테러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하고 있다. 쿠르드족 문화센터 인근에 산다는 이탈리아계 프랑스인 미셸 보카라 씨는 “사건 당일 오전에 빵을 사러 나왔다가 불과 100m 떨어진 곳에서 총성을 듣고 너무 놀랐다”며 “평화로운 우리 동네와 내 일상이 무너지고 더 이상 마음 편하게 빵을 사러 갈 수도 없다는 생각에 정말 불안하다”고 하소연했다.

조은아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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