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의 한뼘 양생] 우리들의 글쓰기, 자기돌봄과 상호돌봄
인문학 공동체도 추수를 한다. 단 가을이 아니라 겨울에, 나락 대신 에세이로. 농부의 가을걷이가 그러하듯 우리 에세이도 일 년 공부를 정직하게 반영한다. 누군가는 여문 글을, 누군가는 쭉정이를 얻게 된다. 하지만 막판 뒤집기도 언제나 가능한 법이라, 에세이 철이 다가오면 얼굴이 누렇게 뜬 채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뒤늦게 스퍼트를 올리는 학인들로 공동체가 후끈 달아오른다.
하지만 일 년 동안 성실했든 슬렁거렸든, 공부의 마지막 단계, 글쓰기는 예외 없이 어렵다. 우리 중엔 형식을 갖춘 글을 평생 한 번도 안 써봤다는 사람도 있고, 들여쓰기, 문단 나누기 같은 기본 용어조차 낯설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글쓰기의 어려움이 이런 숙련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책을 단순히 요약하는 것도 아니고 책과 상관없는 감정을 토로하는 것도 아닌 글, 우리가 읽은 책에서 길어 올린 개념을 통해 삶을 다시 써나가는 글을 짓는 것이다.
우리의 방법은 수차례에 걸친 합평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글을 읽으면 ‘소감’이 생긴다. “재밌어요”라거나 “잘 읽혀요”라는 반응이 나오면 일단 반은 성공한 것이다. 최악은 “어려워요”인데, 그건 액면 그대로 내용이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글이 두서없고 주제가 불분명하다는 이야기이다. 피드백을 받는 사람에게도 친구들의 질문은 도움이 된다. 내가 대충 뭉개고 넘긴 부분이나, 상투적인 생각과 표현이 드러난 부분, 논리적인 연결이 취약한 부분을 친구들은 귀신같이 찾아내 지적하기 때문이다. 글이 혼란스러운 것은 기술 부족이 아니라 삶이 산만하거나 생각하는 걸 귀찮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차츰 알게 된다. 그렇게 묻고 답하면서, 함께 토론하면서, 글은 고쳐지고 또 고쳐진다. 글쓰기에 관한 한, 우리의 지적질은 우리의 힘이다.
한 친구는 ‘굿바이 엄마’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16년째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어머니에 대해 썼다. 읽고 있는 모든 책에서 어머니를 떠올리던 그녀는, 그러나 말이든 글이든 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두려움, 지루함, 죄책감 등의 온갖 감정이 턱밑까지 꽉 차 있어서 ‘엄마’ 하면 눈물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에세이를 완성했다. 그녀는 “생명은 죽음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죽어가는 엄마를 지켜볼 용기”를 낸다고 했다. 치유의 글쓰기였다.
다른 친구 한 명은 두려움을 주제로 글을 썼다. 가난과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성적 지향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을 때 느꼈던 혼란과 두려움, 그에게 두려움은 취약함이었고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파커 J 파머의 책과 그의 ‘온전함’이라는 개념이 새로운 통찰과 영감을 주었다. 직장인인 그가 꼬박 한 달을 붙잡고 끙끙거리며 완성한 짧은 에세이에서 그는 “두려움이 때론 삶의 추동력이 되었다”라는 것을, 자기에게 두려움과 함께 온전히 자신을 지켜낼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썼다. 글쓰기를 통해 자기 삶을 다시 해석해낸 순간이었다.
유난히 각별했던 오빠를 암으로 잃은 직후 장자 에세이를 쓴 또 다른 친구의 글도 인상적이었다. 삶은 부득이한 것투성이지만 죽음을 포함한 부득이한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으면 자유롭게 된다는 장자의 말을 새기면서 그녀는 오빠의 마지막을 회상했다. 말기 암인 상태로 발견되어 수술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빠는 가족의 한이 될까 봐 수술도 받고 항암치료도 받았다. 그리고 거동을 못하기 직전까지 직장생활의 루틴을 지켰다. 그런 오빠의 태도에서, 그녀는 장자에 나오는 사생 존망이 하나라는 것을 아는 수많은 현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오빠를 잃은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슬픔이지만 오빠의 마지막 모습은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가장 강력한 애도의 형식이었다.
아카데미의 학회 같기도 하고, 방송연예대상 같기도 하고, 추수감사절 같기도 한 에세이 팀 발표를 우리는 지난 연말 열한 번이나 치렀다. 어떤 팀은 서너 명이 발표했지만, 다른 어떤 팀은 열 명도 넘는 학인이 종일 발표했다. 우리는 자신의 글을 발표하고 친구의 글을 들어주는 의례를 통해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응원하면서 한 해를 마무리했다. 글을 통해 삶의 길을 다시 내는 과정에 오은영과 강형욱 같은 전문가의 진단과 조언, 처방은 필요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곡진한 글쓰기는,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자기돌봄, 상호돌봄의 수단이었다.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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