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문 쓴 골든글로브… 아시아·흑인에 문 ‘활짝’
“40년이 걸렸네요. 결코 손에서 놓지 않을 거예요.”
10일(현지 시각) 미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서 열린 제80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중국계 말레이시아 배우 양쯔충(楊紫瓊·60)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뒤 이렇게 말했다. 양쯔충은 1983년 스무 살에 미스 말레이시아로 선발됐고 1980년대 홍콩 액션물 ‘예스 마담’ 시리즈로 유명한 배우. 1997년 ‘007 네버 다이’에 본드 걸로 출연한 이후 할리우드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다.
그는 “할리우드에 처음 왔을 때 꿈이 실현된 줄 알았지만 ‘넌 소수자(minority)야’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놀라운 여정과 믿기 힘든 싸움(fight)이었지만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수상작에서 그는 위기에 빠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우주를 넘나드는 평범한 중국계 이민 가정의 주부 에블린 역을 맡았다. 올해 예순을 맞은 양쯔충은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많아지고 기회는 줄어들지만, 언젠가는 최고의 선물이 온다는 걸 여성들은 모두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상 소감이 길어지자 중단하기 위해 장내 음악이 울렸지만 그는 여전히 할 말이 많은 듯 “입 닥쳐요(Shut up). 때려눕힐 수도 있으니…”라고 말해서 객석에 웃음을 선사했다.
인종차별과 성 추문 논란, 부패 스캔들 등으로 얼룩졌던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올해 부활을 선언하면서 아시아·흑인 영화인들에게 대폭 문호를 열었다. 이날 양쯔충뿐 아니라 베트남 출신 미국 배우 키 호이 콴(51) 역시 같은 영화로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남베트남 출신인 그는 네 살 때 월맹군에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공산화되자 일가족과 탈출한 ‘보트 피플’ 출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아나 존스 2편(1984)’과 ‘구니스(1985)’에 출연하며 일약 아역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성인 배우가 된 이후에는 할리우드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는 이날 시상식에 참석한 스필버그를 바라보면서 감사를 표한 뒤 “운 좋게 어릴 적에 아역으로 선발됐지만, 그 뒤에는 어릴 적 경력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두려웠다”며 울먹였다. 이 밖에도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의 흑인 배우 앤절라 바셋이 여우조연상, 멕시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가 ‘피노키오’로 최우수 애니메이션상을 각각 받았다. 스필버그 감독은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 ‘더 페이블맨스’로 최고상인 작품상과 감독상 등 2관왕에 올랐다.
올해 골든글로브의 과감한 변신은 시상식 존폐 논란에 따른 자구책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이 상은 아카데미 시상식에 버금가는 미국 양대 영화상으로 꼽혔다. 하지만 2021년 미 외신들은 골든글로브를 주관하는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의 호화 외유 의혹 등 부패 스캔들과 폐쇄성 등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과정에서 흑인 회원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 때문에 배우 톰 크루즈는 당시까지 받았던 골든글로브 트로피 3개를 모두 반납했고, 워너브러더스 등 할리우드 대형 배급사들도 불참 방침을 밝혔다. 지난해에는 방송 주관사인 NBC도 생중계를 취소하는 등 시상식 자체가 존폐 갈림길에 섰다.
이 때문에 HFPA는 회원 숫자를 기존의 87명에서 200명으로 늘리고 여성 회원 52%, 흑인·아시아·라틴계 회원의 비율을 51.5%까지 끌어올리는 등 부랴부랴 자체 개혁에 나섰다. 그러자 NBC도 올해 시상식 중계를 재개했다. 하지만 케빈 코스트너(TV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 젠데이아(여우주연상), 어맨다 사이프리드(온라인 영상 부문 여우주연상) 등 주요 수상자와 톰 크루즈 같은 일부 스타는 촬영 일정 등을 이유로 불참했다. 이 때문에 골든글로브의 완전한 정상화까지는 아직 갈 길이 요원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비영어 영화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수상에 실패했다. 지난 2020년 영화 ‘기생충’부터 2021년 한국계 미국 감독 정이삭의 ‘미나리’, 지난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까지 3년 연속 이어졌던 한국 영화·드라마의 수상 행진도 일단 멈췄다. 1980년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에 맞섰던 법률가들의 실화에 바탕한 ‘아르헨티나, 1985′가 이 부문 수상작으로 뽑혔다. 영화 평론가 윤성은씨는 “박 감독 영화의 작품성에 대해서는 현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강력한 경쟁작이 적지 않아서 축구 경기로 치면 대진표가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영화 평론가 전찬일씨도 “여성·장애·신자유주의 같은 강렬한 주제를 다룬 영화들이 수상에 유리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통적인 멜로물인 ‘헤어질 결심’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측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오는 3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국제장편영화상뿐 아니라 감독상 후보작으로 거론되고 있다.
영화 ‘베벌리힐스 캅’ 시리즈와 ‘48시간’으로 유명한 흑인 코미디언이자 배우 에디 머피(61)는 세실 드밀 공로상을 받았다. 이 공로상은 ‘십계’와 ‘지상 최대의 쇼’ 등을 연출한 전설적 감독 세실 드밀(1881~1959)의 이름을 땄다. 머피는 수상 소감에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그는 “성공과 번영, 장수와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는 딱 세 가지만 하면 된다. 세금을 내고,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말고, 윌 스미스의 아내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윌 스미스가 아내를 놀린 코미디언 크리스 록에게 격분해 뺨을 때린 폭행 사건을 빗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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