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을 어찌할 것인가 [박찬수 칼럼]

박찬수 2023. 1. 1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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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 칼럼]대통령이 싫어하는 이준석 대표를 잘라내고, 대통령과 대립하는 유승민 전 의원을 내치고, 이번엔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마저 밀어내는데도 국민의힘은 오로지 ‘윤심’을 좇는 데 여념이 없다. 국정 지지율이 40%를 밑도는데도 오로지 ‘윤심’만 따르는 게 내년 총선에서 유리할 거라고 보는 지금 국민의힘의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하다.
나경원 전 의원이 11일 서울 동작구청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직을 사퇴한 데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박찬수 | 대기자

정치부 일선 기자로 있던 1992년 11월 대선 직전의 일이다. 노태우 대통령 처남인 김복동 국회의원이 여당인 민자당을 탈당해 국민당에 입당하기로 결심하고, 기자회견을 하러 지역구인 대구로 가는 중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노 대통령은 급히 김 의원을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김 의원은 결국 동대구 톨게이트(요금소)에서 안기부 직원과 경찰들에게 막혀 차를 서울로 돌려야 했다. 아무리 처남이라지만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정치적 선택에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개입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요즘 국민의힘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이런 일이 수십년 전에나 있었던 건 아닌 듯싶다. 나경원 전 의원의 당대표 출마를 막기 위한 윤석열 대통령의 집요한 압박은 대통령이 당총재를 겸하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을 방불케 한다. ‘민심보다 당심이 중요하다’며 당대표 선출 방식을 갑자기 바꿔 국민 지지율이 가장 높은 유승민 전 의원을 밀어낸 게 엊그제 일이다. 이번엔 당심의 지지가 높은 나 전 의원을 솎아내기 위해 대통령실 참모들이 전면에 나섰다. ‘친윤’을 자처하며 대통령을 위해 모든 걸 다 하겠다는 나 전 의원마저 당대표로 마뜩잖아하는 걸 보면, ‘윤심’에 들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더 어려운 일인 듯싶다. 정당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진전된 줄 알았는데, 2023년 집권 여당에서 ‘윤심’의 깊이를 헤아려야 하는 상황을 지켜보는 건 황당한 일이다.

탈당하려는 국회의원을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붙잡아 되돌리는 일이나, 저출산 대책을 밝힌 나 전 의원 발언을 문제 삼아 “정부 기조와 맞지 않는다” “새빨간 거짓말을 한다”고 몰아세우는 것이나, 시대 흐름에 따라 방식만 바뀌었을 뿐 ‘대통령의 선거 개입’이란 본질은 다를 게 없다. “나경원이 공직을 자기 정치에 활용한다”거나 “중도 확장력이 없어 총선을 치를 수 없다”는 대통령 참모들의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은 지 석달 만에 사의를 표명한 무책임한 태도를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실이 저렇게까지 나 전 의원을 몰아세우며 오직 대통령이 낙점한 인사를 당대표로 만들겠다는 건, 시대착오적인 권력의 오만이다.

오죽하면 친박 핵심이던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가 “룰(규정)까지 바꿨는데, 나경원까지 유승민과 같은 방식으로 정리하면 윤 대통령이 굉장히 어려워진다. 이건 선거 개입이고, 박근혜 대통령 때보다도 훨씬 심하다”는 말을 했을까? 카리스마 넘치던 박 대통령보다 윤 대통령의 정치 개입이 훨씬 직설적인 건, 그가 정치 경험이 없기 때문에 더 용감한 것일까.

해촉까지 검토한다는 소리가 나오자, 나 전 의원은 10일 저출산고령사회위 부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대통령께 심려를 끼쳐드렸다”는 게 사퇴 이유다. 대통령실은 처음엔 사의 표명 사실을 부인하다가 하루 지나서야 “김대기 비서실장에게 ‘문자’로 사의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대통령께 심려를 끼쳐드렸다”는 여당 중진과 “대통령이 사표를 처리할지 짐작할 수 없다”고 비꼬는 대통령실 참모들 싸움에 ‘국민’과 ‘당원’은 낄 자리가 없다.

판사 출신인 나 전 의원이 윤석열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당대표에 도전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렇게까지 당에 개입하면서 모든 걸 자기 뜻대로 하려는 대통령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정치인으로서 나경원의 생명은 아마 지속되기 힘들 것이다. 더 중요한 건 국민의힘이 대통령의 도 넘은 당무 개입에 아무 말 못 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싫어하는 이준석 대표를 잘라내고, 대통령과 대립하는 유승민 전 의원을 내치고, 이번엔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마저 밀어내는데도 국민의힘은 오로지 ‘윤심’을 좇는 데 여념이 없다. 윤 대통령에겐 ‘국정농단 사건으로 망한 정당을 내가 집권하게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있을 것이고, 이것이 지금 국민의힘이 윤 대통령에게 꼼짝 못 하는 이유일 터다. 그러나 선거를 결정짓는 건 대통령의 마음이 아니라 국민의 마음, 곧 민심이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친박’ ‘진박’ ‘종박’이란 말까지 나오며 대통령과 가깝다는 걸 강조한 건, 어쨌든 박 대통령이 ‘선거의 여왕’이란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국정 지지율이 40%를 밑도는데도 오로지 ‘윤심’만 따르는 게 내년 총선에서 유리할 거라고 보는 지금 국민의힘 지도부의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하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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