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희 칼럼] 빌라왕과 전세의 운명
세입자들 "돈 떼일까" 공포
보증금 보호 해법 못찾으면
전세 종말은 시간 문제
10여 년 전쯤 부동산 업계를 취재할 때 빌라 투자로 거액을 번 사업가가 화제였다.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며 모은 돈으로 '마이너 투자처'인 빌라를 사들이거나 신축해 100억원대 자산가가 된 인물이었다.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빌라왕'이었다. 투자 귀재로 이름을 날렸지만, 몇 해 후 건설 경기가 위축되면서 그가 사기 혐의로 법정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조 '빌라왕'과 달리 최근 이슈가 된 '빌라왕'은 빌라 전세 사기꾼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빌라왕뿐 아니라 빌라의 신, 건축왕 등 서민 세입자들을 울리는 사기범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사망한 빌라왕 김 모씨는 1139채, 빌라의 신 권 모씨는 3493채를 보유하고 있었다. 입이 딱 벌어지는 수준이다.
사기 일당들이 보증금을 가로채는 수법은 교묘하다. 주로 건물주, 분양대행사, 빌라왕, 공인중개사 등의 '팀플레이'로 이뤄진다. 먼저 시세 정보가 정확하지 않은 신축 빌라나 다가구주택의 전세가격을 매매시세보다 높게 책정한다. 세입자에게 임대사업자인 집주인이 보증금반환보험에 가입했으니 안전하다고 거짓말한다. 명의를 빌라왕에게 이전한 후 세입자와 계약하도록 한다. 이들이 차액을 나눠먹고 나면 빌라는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는 '깡통주택'이 된다. 사기꾼들의 먹잇감이 된 빌라는 서민들의 주거지다. 서울 주택의 30%가 빌라다. 하지만 시세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다 보니 사기꾼들이 전세금을 부풀려도 세입자들이 알 길이 없다. 전세사기에 걸려든 이들이 신혼부부, 대학생 등 서민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전세보증금반환보험이라는 보호망이 있지만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다. 통상 집주인이 돌려주지 못할 상황이 되면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대위변제를 하고 구상권을 청구해 받아내게 된다. 하지만 빌라왕처럼 사망한 경우 상속자가 확정될 때까지 지급이 무기한 보류된다.
사망한 빌라왕 김씨는 최고급 마이바흐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빌라왕은 사실 왕이 아니다. 경제적 능력 없이 명의만 빌려주는 속칭 '바지사장'이 대부분이다. 깃털에 불과하다. 이들이 갑작스럽게 줄줄이 사망하는 것도 석연치 않다. 경찰은 빌라왕 배후세력으로 기업형 조직이 있다고 보고 수사를 확대 중인데 서민들의 재산을 가로채고 가정을 파탄 낸 몸통을 철저히 밝혀내는 게 급선무다.
빌라왕 사건의 배경에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사금융이자, 100년간 유지돼온 전세제도의 취약한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전세는 집주인은 이자 없이 목돈을 융통할 수 있고, 세입자는 퇴거 때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어 '주거 사다리'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사기를 당할 경우 보증금을 잃을 위험이 있고, 전세금이 갭투자의 밑천으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
전세사기로 제도의 허점이 드러나면서 전세 종말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금리 인상으로 전세의 월세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사태가 전세 소멸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전세가 유지된 것은 보증금 회수에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빌라왕 사건으로 이런 신뢰가 산산조각 났다. 피해자들은 "이제 뭘 믿고 전세를 사느냐"며 전세제도에 불신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가 뒤늦게 집주인 세금 체납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빌라 시세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피해자들의 공포는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전세금을 떼이는 데 대한 불안감이 얼마나 컸으면 주 단위로 임대료를 내는 이른바 '주세(週貰)'까지 등장했겠는가.
선진국에서 이 제도가 살아남은 곳이 없는 만큼 선진형 주택금융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보증금 보호 등 제도 보완의 해법을 찾지 못하면 전세는 소멸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 전세의 운명이 불안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심윤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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