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토피아는 이룰 수 없는 꿈일까 [Big Picture]

2023. 1. 1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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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너지와 기후 사이 해법 못 찾는 세계

에너토피아, '에너지'와 '유토피아'의 합성어이다. '값싸고, 깨끗한 에너지를 넉넉하게 쓰면서 풍요롭고 건강하게 사는 세상'을 뜻한다. 인류가 지향하는 목표이고, 세계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그러나 현재 세계가 당면한 상황은 오히려 에너지 '디스토피아(암울한 미래 세계)'에 가깝다. 에너지는 싸지도 깨끗하지도, 또 넉넉하지도 않은 것이 지금 현실이다. 그것도 최근 수년 사이에, 특히 지난 한 해 동안 모든 상황은 급격히 더 나빠졌고, 빨리 개선될 것 같지도 않다. 천연가스 현물 가격은 7~8배, 전기 요금도 2배 이상 뛰었는데 각국의 전기, 가스 등 유틸리티 기업은 빈사 상태이다. 최근 수년간 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 배출은 오히려 늘어나면서 '기후 변화' 정도가 아니라 확연한 '기후 재앙' 시대로 가고 있다. 석탄, 석유 등 깨끗한 대기와 지구를 해치는 화석연료가 오히려 황태자 취급을 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 상황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게 했지만, 전쟁이 끝나도 다소 개선은 되겠지만 근본적 반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 복합적 상황에 대한 세계의 대응은 무기력하다. 금년도 세계 경기가 'R의 공포'를 느낄 정도이기에 유가도 떨어지고 전반적으로 에너지 수급이나 가격이 저절로 안정될 것만 기대하고 있다. 또 올겨울 유럽의 이상 난동으로 가스 가격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에너지 공급망, 특히 유럽의 천연가스 공급망(PNG)이 이미 무너졌기에 그 여파는 광범위하고 오래갈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이 들여오는 LNG 가격이 다소 떨어진다 해도 구조적 한계가 있고 석탄, 석유도 진영 간 냉전 상태에서 장기 비축을 위한 경쟁이 치열할 것이다. 그러면서 석유, 가스 등 화석연료의 글로벌 기업들은 역대급 호황을 누리고, 연기금들은 수익성 낮은 ESG 분야보다는 오일가스 부문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니 급격한 기후 변화로 인한 재앙의 강도와 속도는 점점 사나워지고 있다. 올겨울 미국은 영하 40도의 강추위와 폭설로 그야말로 영화 '투모로우'의 실제 상황이다. 여름은 더 덥고, 홍수와 산불은 일상화되고 있다. '그레타 툰베리' 등 기후 대응 행동주의자들의 목소리는 더 처절해졌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예상대로 이집트의 COP27(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은 개발도상국 지원 등 일부 사항을 빼곤 거의 무의미하게 끝났다. 탄소배출 감축은 한 해가 급한데, 이미 지난 회의 때 탄소배출 1위와 3위인 중국과 인도는 탄소중립 시기를 각각 2060년, 2070년으로 멀리 미뤄버렸다. 거의 국제적 의무를 질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내년도의 두바이 회의에서도 무슨 획기적인 탄소 감축안이 나올 수 있을까? 더욱이 내년은 미국 대통령 선거 해이다. 만일 공화당으로 정부가 바뀌면 국제적 탄소 감축 의무는 물 건너가고, 세계인들은 그저 변화하는 기후에 적응해가며 살아야 하고, 개도국들의 기후 난민과 식량난 문제는 심각해질 것이다.

◆ 한국, 에너지 최우량국이었지만…

한국은 에너지, 자원의 최빈국에서 세계가 정말 기적으로 여길 정도로 에너토피아의 문 앞까지 갔었다. 에너지의 원료가 되는 석유, 석탄, 가스, 우라늄, 햇빛 및 바람 어느 것이나 아예 없거나 부족하다. 그런데도 어느 나라보다도 석유, 가스를 안정적으로 비축해왔고, 석탄도 양질탄으로 공급에 문제가 없었다. 다만 해외 자원 개발은 정권이 바뀌면서 속죄양이 된 것은 통탄스럽다. 전기 부문에서는 발전, 송전, 배전 등 전 분야에서 그 품질과 효율, 운영 면에서 탁월한 선진국이었다. 한때는 '포브스(Forbes) 세계 1등'의 평가를 받은 적도 있었다. 원전은 수출 산업이 됐다. 전기저장장치(ESS) 배터리 등 에너지 신산업 분야도 세계를 선도하며 우리 경제의 차세대 먹거리로 자리 잡고 있었다.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 분야도 열심히 쫓아가고 있다. 그런데 지난 정부 탈원전 정책이 등장하면서 대혼란 상태가 발생하고, 어찌 보면 세계에서 에너지 부문 갈등과 혼란이 가장 큰 나라가 됐다. 2050년 탄소중립은 먼 약속이라 치더라도, 2030년 온실가스 40% 감축은 무슨 수로 할지, 또 에너지 연료가가 치솟는 와중에서 어떻게 에너지 수급과 가격의 안정을 도모할지 답답할 따름이다. 한때 세계 1등의 에너지 우량국이었기에 그 걱정의 골은 더 깊다.

그런데 한국의 새 정부 초기 에너지 정책에서 핵심은 탈원전 철회다. 탈원전 정책, 너무나 어이없는 자해 행위였기에 대부분 국민은 속 시원해한다. 그러나 한국이 처한 에너지 상황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한국 온실가스 배출의 세계적 순위는 8~9위권이다. 통제가 안 되는 중국, 인도, 러시아, 이란을 빼면 4~5위 수준이다. 그래서 한국은 '기후변화 악당국' 소리를 들은 것이다. 세계의 큰 기업들은 RE100을 무기로 한국 기업의 청정에너지 사용을 강요한다. 유럽은 올해부터 한국 제품에 대해 탄소 국경세를 물리겠다고 으름장이다. 그런데 한국은 태양광, 풍력, 지열, 바이오 등 어떤 재생에너지 분야도 좋은 여건이 아니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이 크고, 경제성도 떨어진다. 해당 지역 주민 민원도 어느 나라보다 드세다. 그렇다고 수소나 소형원자로, 탄소포집, 핵융합 등 미래 에너지 분야는 당장 끄집어내 쓸 수 있는 메뉴가 아니다. 전력 시장은 한전, 가스공사 등 공기업 독점 구조로 이들의 천문학적 적자는 시설 안전을 걱정하게 만든다. 요금을 2배 이상 올려야 어떻게 답이 나오겠지만, 가계, 산업 및 물가 부담으로 그럴 수도 없다. 전기 먹는 하마인 데이터센터 설립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이 복잡계를 몇 차 방정식으로 풀어야 할지….

◆ 더 치밀해야 할 한국의 에너지, 기후 해법

탄소를 대거 감축하면서 요금도 덜 올리고, 에너지 균형도 맞춰야 하는데, 에너지 공급 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도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동행에서 길을 좀 낼 수 있다. 원전과 재생에너지는 반대말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 보완성이 더 크다. 둘 다 무탄소 전원이지만, 원전은 수용성 문제, 재생에너지는 간헐성·경제성 문제가 있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상호 간에 홍보해주고 특정 지역이나 특정 대형 사업장 등에 기술적으로 공동 활용할 수 있는 방안도 찾아보아야 한다. 대규모 연안 해상 풍력과 인근 원전 단지는 계통을 병합해서 송전망을 짤 수도 있다. 모든 산에 지천으로 깔려 있어서 부식되면서 탄소배출을 하는 미이용목을 바이오 발전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도 경제적이다. 세계에 약속한 2030 탄소 40% 감축을 지키면서 에너지 안정을 기할 수 있으면 대성공이다. 그렇지만 대규모 에너지 수요 감축을 동반하지 못하면 어려울 것이다. 이 부문에서 여지는 있다. 디지털 전환과 인공지능을 통한 에너지 절감과 에너지 기기 효율화를 모색하는 방안,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 인상으로 절약을 유도하는 방안, 일부 공공 부문 중심으로 강제 절약을 시행하는 방안 등이 있을 것이다. 스마트홈, 스마트공장, 스마트농장, 스마트빌딩 등도 큰 절감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는 세계 전체로 10조달러가 넘는다는 에너지 신산업 부문의 대외 진출을 위한 발판이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쉬운 것은 없지만, 불가능한 길은 아니다. 이렇게 해서 에너토피아의 블록을 쌓아 나갈 수 있다.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일이 있다. 현재의 에너지 시장 구조, 특히 전력 송배전 및 판매의 독점 체제를 단계적으로 개방해야 한다. 공공재로의 전력과 가스의 요금 및 수급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지금까지는 독점 체제의 정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현 체제로는 세계 에너지의 위기가 터지니까 위기 대응의 순발력이나 효율성 면에서 국가와 국민을 불안하게 함을 이번에 경험했다. 그렇다고 졸속한 개방화는 공급의 혼란과 심한 공기업 불안정도 유발할 수 있으니 단계적인 추진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속도를 늦출 수는 없다. 노동, 연금, 교육 개혁 못지않게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중요한 것이 에너지 구조 개혁이다. 시장성, 경제성, 산업성, 환경성, 공공성, 수용성, 수급 안정성, 시설 안전성 등 맞춰 나가야 할 변수가 너무 많고, 각 변수의 최대공약수를 찾아내야 한다. 전문성도 필요하지만, 균형과 조화를 이뤄내는 종합적 식견도 필요하다. 어느 특정 부처가 추진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거의 모든 정부 부처가 다 걸려 있고, 정무적 판단도 필요하다. 힘을 가진 특별 TF 같은 것이라도 만들어서 정부 초기에 해내야 할 일이다. 회의, 용역만 하다가 시간 다 놓친 '원전 핵 폐기물 처분장 건설'과 같은 꼴이 돼서는 안 된다.

UAE의 마스다르시티 전경.

◆ 한국판 '네옴시티'나 '마스다르시티'도 구상해볼 때

세계적으로 추진되는 에너토피아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네옴시티'와 아랍에미리트(UAE) '마스다르시티'이다. 화석연료의 나라에서 화석연료를 배제하고 거대한 친환경 도시를 만들어 깨끗하고 편리하고 안전한 나라로 가겠다는 국가 개조 사업이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나 무함마드 빈 자이드 UAE 왕세제같이 강력한 국가 통치자가 주도하고 있고, 20~30년 후의 미래 세대를 위한 메가 프로젝트이다. '네옴'은 이제 착수 단계이지만, '마스다르'는 완성 단계로 작년 말 삼성의 이재용 회장도 다녀왔다. 느낀 점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도 도전 못할 것이 없다. 한국은 에너지 효율과 디지털 전환의 속도가 세계적이며, 무탄소 전원인 원전에서 성공했고, 재생에너지 확대도 정상궤도에 들어서 있다. 무탄소, 고효율 에너토피아를 향한 스마트에너지시티 건설을 이제 추진해볼 만하다. 무탄소 에너지로 생활과 산업이 영위되며 전기나 수소차가 교통수단이 된다. 또 RE100이 필요한 기업들이 모이고, 청정에너지로 운영되는 데이터센터가 집결될 것이다. 가정마다 ESS가 들어오고, 빌딩, 학교, 농장, 공장 등이 모두 효율 높고 깨끗한 일과 삶의 터전이 된다. 이렇게 청정에너지의 거대한 수요가 생기면 청정에너지 공급은 따라가는 것이고, 이는 국내외 천문학적 투자를 유도하고 지역 균형 발전도 촉진할 것이다. 2050 탄소중립을 맞춰내는 동시에, 루스벨트의 뉴딜 효과를 겨냥하는 초대형 사업이 될 수 있다. 그러면 OECD 국가 중 최초로 시도되는 에너토피아 건설이 될 것이다. 신도시 건설은 지금까지 주택 공급 차원에서만 보아왔지만, '에너토피아 건설' 차원에서도 생각해보자. 물론 이는 대통령 프로젝트이다.

[조환익 전 한국전력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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