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지붕을 받쳐주는 단단한 기둥 같은 배우 김서형

아이즈 ize 조이음(칼럼니스트) 2023. 1. 1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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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조이음(칼럼니스트)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김서형, 사진제공=왓챠

드라마나 영화의 주연을 맡는 배우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그 배우의 이름을 들었을 때 대중 대부분이 공감할 수 있는 대표작이나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지, 아니면 대표작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고, 한두 가지의 이미지로 정의 내릴 수 없는지. 이 같은 분류 방법으로 봤을 때 배우 김서형은 누가 뭐라 해도 전자에 속하는 배우라 할 수 있다. 그가 출연한 많은 작품 가운데에서도 유독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 그 속에서 김서형이 연기한 캐릭터가 하나의 단어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가 지난달 1일 공개된 왓챠 오리지널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극본‧감독 이호재, 이하 '오좀매')에 등장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조금 놀란 기억이 있다. 인문학자 강창래 작가의 동명 에세이를 원작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점점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돼가는 다정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그의 남편 창욱이 좋은 식재료와 건강한 레시피를 개발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 뻔한 답이지만 그간 김서형의 얼굴로 대중에게 익숙한 캐릭터가 이 같은 이야기에 등장할 리는 없는 탓이다. 같은 이유로 드라마가 더욱 궁금해졌고, 이 작품이 공개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김서형은 '오좀매'에서 한 끼 식사가 소중해진 워킹맘 정다정 역으로 등장한다. 출판사 대표인 다정은 일로 만난 강창욱(한석규)과 사랑에 빠져 가정을 꾸린 인물. 하지만 동료에서 연인으로 다시 부부라는 이름으로 관계에 새로운 이름표가 붙었음에도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대하는 태도와 기대하는 마음 등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악화일로를 걷던 이들은 떨어져 사는 것으로 이름표만 붙은 관계를 남겨둔다. 이마저도 정리할 예정이었지만, 정다정이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으면서 변화를 맞이한다. 정다정은 법적 배우자이자 아들(진호은)의 아빠인 강창욱에게 "자기가 날 돌봐줬으면 좋겠어."라며 남은 삶을 부탁한다. 이를 받아들인 강창욱은 정다정에게 힘이 될 음식을 만들기 위해 낯설기만 했던 주방과 거리를 좁혀간다. 이 과정에서 고작 세 사람뿐이었지만 마음은 뿔뿔이 흩어져있던 정다정의 가정에는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김서형, 사진제공=왓챠

이야기의 시작부터 정다정의 병세는 상당히 진행된 상태기에, 드라마가 후반부를 향해갈수록 점차 수척해지고 병세도 더욱 깊어진다. 그럼에도 '오좀매'에는 기존 드라마나 영화에서 암 환자를 등장시켰을 때에 짐작 가능한 큰 아픔을 전달하진 않는다. 관계 정리를 생각하던 남편에게 검사 결과를 함께 들어달라 말하는 용기, 결과를 확인한 이후에는 저물어가는 자신의 삶을 그에게 부탁하는 결단력까지 지닌 캐릭터답게, 자신의 방식대로 병마와 싸운다.

 "맞닥뜨려야 하는 일이라면, 준비된 모습이면 좋잖아."

모두가 알고 있지만, 눈앞으로 다가오기 전까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삶의 마침표. 이를 눈앞에 두고도 정다정은 위같이 말하며 자신의 주변을 차분하게 정리한다. 담담해서 더욱 담대하게 느껴지는 인물의 행보는 예상 가능한 결과마저 '혹시'하는 기대를 품게 하기도. 정다정은 이미 판정 난 삶의 시간표를 바꾸진 못하지만, 이야기가 끝을 향해가는 동안 정다정의 가족 구성원들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다. 손에 쌀알을 들어 올린 듯 뭉쳐지지 못했던 이들은 어느새 한 공기의 밥처럼 서로를 생각하는 끈끈한 사이가 된다.

김서형은 배우 한석규의 따뜻하고 담담한 내레이션이 빛을 발하는 이 드라마에서 마치 커다란 지붕을 받치는 기둥처럼 이야기의 굵은 뼈대를 만들어낸다. 더없이 말갛지만 단단한 얼굴로 그가 내놓은 정다정이란 인물은 분명 대중에게 익숙한 전작들을 통해 만난 캐릭터들과 첫인상부터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하지만 올곧음과 단단함에 있어서만은 같은 결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김서형(중간), 사진제공=왓챠.

생각해 보면 지금껏 대중이 기억하는 김서형의 대표작들 속 그가 연기한 캐릭터는 '국민 악녀' 혹은 '카리스마'라는 단어로 묶이지만, 이 역할들 대부분에는 악인이 될 수 밖에 없던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했다. '아내의 유혹' 신애리부터 '스카이캐슬'의 쓰앵님 김주영까지, 캐릭터에 입장에선 '악'이란 말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강'해져야 했다는 설명이 더욱 들어맞는다. 최근 작품인 '마인'의 정서현 역시 저와 제 주변을 지키기 위해 차가운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식 석상에서도 빛을 발하는 패션 센스, 도회적인 분위기 탓에 '카리스마' '쎈언니'로만 그를 떠올리지만 대중이 놓친 김서형의 필모그라피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캐릭터가 존재한다. 나 역시 모든 작품, 모든 캐릭터를 알고 있다 말할 순 없지만 그 속에서도 김서형이 선택하고 연기한 작품, 인물은 모두 '그만의 단단함'을 지녔음은 알고 있다.

결국 '오좀매' 속 정다정은 외피만 달랐을 뿐 지금까지 김서형의 선택과 별반 다르지 않은 캐릭터라 말하고 싶다. 어떤 상황에도 의연할 수 있도록, 단단한 심지를 지닌 인물. 그래서 그의 다음 선택도 궁금해진다. 김서형의 얼굴로 만날 다음 캐릭터는 또 어떤 단단함을 지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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