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어준 지켜야 산다’고 믿으신다면
엄격한 잣대는 막강한 ‘언론권력’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박영흠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
청취율 1위를 자랑하던 교통방송(TBS)의 라디오 프로그램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문을 닫았습니다. 여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 서울시의회가 2022년 11월 TBS에 대한 서울시의 예산 지원을 중단하는 조례안을 통과시키며 압박한 결과입니다.
김어준은 곧바로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이라는 이름의 새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습니다. 이 채널은 방송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사흘 만에 구독자 3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김어준의 막강한 영향력과 그에 대한 진보 성향 시민의 뜨거운 지지가 재확인된 셈입니다.
시민사회 자정으로 해결이 순리이지만
서울시가 힘으로 김어준의 마이크를 빼앗은 건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권력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진행자를 내쫓거나 방송사의 밥줄을 끊어버리는 건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을 다루는 방식이 아닙니다.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다면 권력의 손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자정에 따라 해결되는 게 순리입니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은 한국 사회가 시급히 달성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김어준의 방송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닙니다. 시사 정보를 전달하고 해설하는 언론인이 한쪽 진영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플레이어가 돼선 곤란합니다.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기계적 중립을 지키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옳은 건 옳다 하고 그른 건 그르다고 말해야죠. 이게 시시비비(是是非非)입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든 한쪽 편이 옳다고 말하는 건 시시비비와는 거리가 멉니다. 김어준이 옳고 그름을 가리기보다 ‘우리 편’에 정치적으로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따지는 언론인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언론의 목을 조르는 서울시도, 노골적으로 진영 논리만 따르는 김어준도 함께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진보 진영에서 발끈하는 분이 많습니다. 거악이 눈앞에 있는데 그에 맞서 싸우다 생긴 작은 잘못까지 싸잡아 비판하는 건 ‘양비론’이라고 몰아붙입니다.
양비론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일까요? 양비론이 욕먹는 건 선택이나 판단을 하지 않고 소신 없이 비겁한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쪽을 동시에 비판하는 행위가 항상 엉거주춤한 중립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명확한 기준과 원칙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린 결과로 나온 양비론은 만족스럽지 않은 두 개의 보기 중에 선택을 강요하는 현실을 바꾸고 새로운 선택의 길을 여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너는 어느 쪽이냐’가 더 큰 해악
요즘 유행하는 ‘밸런스 게임’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최악의 두 가지 상황을 던져주고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하도록 요구합니다. 하지만 현실이 밸런스 게임과 같아선 안 되겠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흑과 백 두 가지 색깔로만 구성돼 있지 않습니다. 잘 보이진 않지만 무지개처럼 다양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서울시와 김어준을 동시에 비판하는 양비론은 ‘TBS판 밸런스 게임’이 강제하는 편협한 시야에서 벗어난 대안의 지평을 열어줍니다.
지금 정치를 망치고 언론을 망치는 건 양비론이 아닙니다. 선택지가 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너는 어느 쪽이냐’를 묻는 흑백논리가 더 큰 해악입니다. 선과 악, 아군과 적군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편을 갈라 상대를 절멸시키는 데만 몰두하면, 정치는 내전이 되고 저널리즘은 종교재판이 돼버립니다.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성찰이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북한과 날카롭게 대립하던 시절 남한 사회 내부 모순에 대한 비판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처럼 전쟁 중에 우리 편에 ‘내부 총질’을 해서 적을 유리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논리가 지배하게 되는 겁니다. 악마의 존재가 내 잘못에 눈감아도 되는 명분이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김어준의 문제점을 거론하면 “왜 종합편성채널의 편향성은 얘기하지 않고 김어준만 뭐라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옵니다. 물론 종편의 문제도 비판해야지요. 하지만 종편의 편파성이 김어준의 편파성을 정당화할 순 없습니다. 이렇게 이쪽저쪽 모두 상대의 잘못을 알리바이 삼아 면죄부를 얻다보면 우린 영원히 하향 평준화된 편파적 저널리즘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김어준도 언론도 때로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기성 언론이 허위 보도를 하면 시민의 거센 비판을 받습니다. 당연한 일이고 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진보적 시민사회도 김어준에게만큼은 무척 관대합니다. 세월호 고의 침몰설과 제18대 대선 개표 조작설, 미투 공작 음모론 등 여러 ‘헛발질’에도 그에 대한 신뢰는 견고합니다. ‘김어준이 하면 로맨스, 언론이 하면 불륜’일까요?
시시비비는 정확히 가려야
언론이 잘못된 보도를 하면 비판하는 엄격한 잣대를 김어준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김어준은 더는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풍자로 기득권을 조롱하던 비주류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2위(2021년 <시사저널> 조사)에 오른 ‘언론권력’입니다. 웬만한 언론사 하나보다 막강한 의제설정 능력과 여론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론과 마찬가지로 김어준도 비판의 성역이 될 순 없습니다.
진보 진영에는 ‘김어준을 지켜야 진보가 산다’고 믿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입니다. ‘우리 편’의 잘못에 관대했던 진보 진영의 ‘내로남불’은 중도층이 진보 정치에 등을 돌리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계속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이중잣대로 김어준을 ‘결사옹위’하는 데 몰두하면 진보 진영은 ‘반향실 안 개구리’가 되어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김어준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건 김어준을 끌어내리겠다거나 다른 누군가의 편을 들겠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는 흑백논리와 ‘닥치고 지지’에서 벗어나 시시비비를 정확히 가리자는 겁니다. 김어준이 잘한 일은 잘했다고 박수 쳐주고,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분명히 말하자는 겁니다.
시시비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김어준의 문제점을 알게 된다고 곧바로 반대쪽 손을 들어줄 만큼 시민은 어리석지 않습니다. ‘언론 탄압’과 ‘편파 방송’, 두 가지 끔찍한 보기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가혹한 밸런스 게임은 이제 그만 끝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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