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처럼… ‘장소’가 ‘사랑’을 구체화한다”
■ 산문집 ‘장소의 연인들’ 펴낸 문학평론가 이광호
사랑 다룬 문학속 공간들 탐구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는
개방감과 은밀함 동시에 가져
두 사람 만남의 ‘극적인 장소’
사랑의 장소는 소유할수 없고
그곳에 얽힌 기억도 점차 소멸
사랑에서 ‘실패’는 당연한 것
“사랑은 살아 있는 몸이 ‘장소’와 만나 일어나는 유물론적 사건입니다. 사소하고 우연한 장소는 연인들의 시간을 통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체성을 부여받습니다.”
문학평론가인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가 사랑을 다룬 문학 텍스트 속 공간의 의미를 탐구한 ‘장소의 연인들’(문학과지성사)을 출간했다. 이 대표는 ‘사랑의 미래’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너는 우연한 고양이’에 이은 네 번째 산문집에서 아니 에르노, 사뮈엘 베케트, 윌리엄 셰익스피어, 버지니아 울프 등의 작품을 넘나들며 사랑이 피어나고 스러지는 장소의 몽타주를 완성한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픽션 에세이’를 표방한 책은 텍스트를 둘러싼 사유의 조각들 틈틈이 ‘나’와 ‘그’라는 익명의 존재를 통해 실제 사건인지 허구인지 모를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단테의 ‘신곡’에서 두 연인이 마주친 다리를 묘사한 뒤 포르투갈 타구스 강의 산책로를 걷는 ‘나’와 ‘그’를 비추는 식이다.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문학과지성사에서 이 대표를 만나 장소에 주목한 이유를 물었다.
“사고실험을 하듯 비대면의 시대에 접촉의 ‘장소성’을 사유하고 싶었습니다. 오랫동안 사랑한 소설 가운데 흔하고 익숙한 장소에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 넣어주는 작품을 골랐습니다.” 이 대표가 말하는 색다른 시선 덕분에 의미가 풍부해진 장소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같은 곳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로미오는 원수 집안의 담장을 넘어 발코니 위에 선 줄리엣을 바라보며 사랑을 서약한다. 이 대표는 “발코니라는 장소가 없었다면 두 사람이 진심을 극적으로 알게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한 공간이 개방감과 은밀함의 느낌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은 발코니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적는다. 또 베케트의 ‘첫사랑’에서 ‘나’와 그녀가 만나는 벤치는 “혼자만의 공간일 수 있지만, 누군가의 틈입에 대해 열린 곳”이며 “사랑이라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 잠재된 곳”이다.
이처럼 연애의 흥분과 환희가 생생히 전해지는 문장도 많지만, 에세이집 전체를 지배하는 정조는 비관적 정서에 가깝다. 글쓴이가 연인들 장소는 필연적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라고, 그래서 언제나 실패의 장소가 될 수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랑에서 실패는 당연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장소를 영원히 소유할 수 없고, 장소에 얽힌 세밀한 기억도 점차 희미해지기 마련이니까요.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에서 여자는 떠나버린 남자가 방에 남긴 담배꽁초와 옷가지를 그대로 보존하려 하지만, 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가장자리가 해지고 색이 바랜 장소를 기억하는 행위에 사랑의 또 다른 가능성이 스며들길 바랄 뿐입니다.”
‘장소의 연인들’은 세상의 부조리와 한 발 떨어져 사랑을 사유하는 것만으로도 불온하고 급진적인 상상력에 가닿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대표의 말처럼 사회는 제도에 편입되지 않은 연인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연인들에겐 두 사람을 위한 온전한 ‘장소의 몫’이 주어지지 않기에, 연인들의 불꽃 같은 열정은 그 자체로 반(反)사회적이다. “어떤 ‘주장’을 펼치기 위해 책을 쓴 건 아니지만, 제도 바깥에 머물러 있는 사랑에도 관용적인 사회가 돼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예컨대 동거 커플이나 동성애 커플에게도 결혼한 부부와 유사한 사회적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 대표는 장소의 형식적 질서와 위계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도 ‘연인들의 장소’에 품은 급진성을 확인한다고 말했다. 연인과 함께 있기 위해 정차(停車)한다면 자동차는 ‘기계’가 아닌 ‘방’이 되고, 아무런 통제가 없는 순교 성지(聖地)의 주차장은 ‘연인들의 성지’가 된다는 것이다.
‘사랑의 미래’ 이후 일관되게 추구하는 픽션 에세이에 대해선 인칭과 성(性)을 둘러싼 미학적 실험이자 오만한 태도를 경계하는 형식이라고 했다. ‘사랑의 미래’에서 분명한 성별을 지닌 3인칭을 부여받은 ‘그’와 ‘그녀’는 ‘장소의 연인들’에 이르러 ‘나’와 ‘그’라는 중성적 존재로 변모한다. “장르적으로 불분명한 글쓰기에 매력을 느낍니다. 소설에도 작가의 경험이 포함된 경우가 많고, 에세이에도 사실과 무관한 주관적 시선이 개입되기 마련입니다. ‘장소의 연인들’에서 나와 그를 고정돼 있지 않은 인물로 묘사한 이유는 ‘작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과 거리를 두고 싶어서입니다. 한 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겸손한 모호함’이야말로 ‘객관적’ 카메라로 인물을 대상화하는 영상 콘텐츠에 대적할 수 있는 문학의 무기입니다.”
■ 장문석의 ‘토리노…’ 이소진의 ‘경험이…’ 출간
‘채석장 시리즈’ 2권도 눈길
이광호 대표의 ‘장소의 연인들’은 문학과지성사가 새로 선보이는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가운데 한 편이다. 채석장 그라운드는 정치·사회·예술·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국내 필자의 통찰을 담은 인문 기획이다. 이 기획은 2020년 3월 이후 꾸준히 독자와 만나고 있는 해외 저자들의 ‘채석장’ 시리즈와 병행 출간될 예정이다.
‘장소의 연인들’과 함께 나온 책은 ‘토리노 멜랑콜리’와 ‘경험이 언어가 될 때’다. 장문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의 ‘토리노 멜랑콜리’는 자동차 기업 피아트가 새로운 생산 조직을 실험한 20세기 이탈리아 도시 토리노를 무대로 한국의 정치·사회 현실을 반추한다. 장대한 산업과 혁명이 공존했던 토리노는 계급투쟁과 노사갈등의 근대적 무대였다. 장 교수는 자본주의가 재편되고 계급이 해체된 역사를 되짚으며 “분산된 투쟁만이 이어지는 오늘날, 저 먼 도시에서의 외침은 하나의 우화로만 남게 될 것인가”라고 묻는다.
노동 연구자 이소진의 ‘경험이 언어가 될 때’는 강남역 살인과 N번방 사건 등을 겪은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이야기한다. 이소진은 페미니즘과 마르크시즘이라는 두 가치를 토대로 ‘나’로부터 ‘세상’으로 시선을 확장하며 계급·여성·자본·소비 등의 주제를 사유한다.
채석장이라는 시리즈 문패엔 돌을 캐내듯 인문학적 사유를 발견하는 기쁨을 전하려는 출판사의 소망이 담겼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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