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무사히 살아 돌아오시길”…병자호란 겪은 어느 노부인의 일기

김석 2023. 1. 1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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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이 한창이던 1636년 12월의 어느 날, 남한산성에서 급보가 날아듭니다.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짐붙이는 생각지도 말고, 밤낮을 가리지 말고 청풍(淸風)으로 가시오."

발신인은 병자호란 당시 고위 관리로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있던 남편 남이웅(南以雄, 1575~1648). 수신인은 그의 아내 남평 조씨(南平曹氏, 1574~1645)였습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니 짐 챙길 생각일랑 말고 어서 청풍으로 피란 가라는 전갈이었죠. 청풍은 오늘날의 충북 제천시 청풍면입니다. 조씨는 그날로 허겁지겁 채비를 하고 피란길에 오릅니다.

길마다 피란 가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상황. 더구나 뼛속까지 한기가 파고드는 겨울의 한복판. 당시 나이 63세의 고령이었던 조씨는 남편도 없이 홀로 식솔들을 데리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갑니다. 섬으로 가면 안전할 거란 생각이었는지 조씨 일행은 배를 얻어타고 충남 홍성의 어느 외딴섬에 들어갑니다.

물이 없는 무인도라. 대나무 수풀에 가서 눈을 긁어모아 녹여서 먹었다. (중략) 피란 온 사람들이 모두들 거룻배로 나가 물을 길어오나 우리 일행은 거룻배도 없고 그릇도 없으니 한 그릇의 물도 얻어먹지를 못하고, 밤낮으로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싶을 뿐이었다.

마음속으로 참으며 날을 보내니 살아 있을 날이 얼마나 되랴. 그래도 질긴 것이 사람 목숨이니 알지 못할 일이다. 한 번에 자식을 다 없애고 참혹하여 서러워하더니 지금은 다 잊고 다만 남한산성을 생각하는가? 망국 중에 나라가 어떻게 된 일을 부녀자가 알 일이 아니지만, 어찌 통곡하고 또 통곡하지 아니하리! - 1637년 1월 17일의 일기

※ 일기 본문은 박경신 역주 《병자일기》(나의시간, 2015)에서 인용했습니다.

물 한 모금 구할 수 없는 처량한 신세. 한평생 양갓집 아녀자로, 조정 고위관리의 아내로 유복하게 살아온 60대 노부인에게는 평생 겪어본 적 없는 가혹한 시련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순간, 조씨는 과거 자신에게 닥쳐온 더 큰 불행을 떠올리죠. "한 번에 자식을 다 없애고"라 한 데서 보듯, 조씨는 자식 4남 1녀를 모두 일찍 잃은 한(恨) 많은 어머니였습니다.
병자호란 시기에 남평 조씨가 만 3년 10개월 동안 쓴 《숭정 병자일기(崇禎丙子日記)》


전쟁 통에 남편도, 자식도 없이 혼자서 식솔들 데리고 살림을 꾸려야 했던 나날들 속에서도 조씨는 일기를 씁니다. 다만 몇 자가 됐든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날그날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죠.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부끄럽고 치욕적인 사건으로 남은 '삼전도의 굴욕' 이후 청나라는 조선의 세자를 볼모로 데려갑니다. 당시 스물여섯의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였습니다. 실록은 그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왕세자가 오랑캐 진영에서 와서 하직을 고하고 떠나니, 신하들이 길가에서 통곡하며 전송하였는데, 혹 재갈을 잡고 당기며 울부짖자 세자가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이에 정명수(鄭命壽)가 채찍을 휘두르며 모욕적인 말로 재촉하였으므로 이를 보고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호위해가는 재신(宰臣) 남이웅(南以雄), 좌부빈객 박황(朴潢), 우부빈객 박로(朴𥶇), 보덕 이명웅(李命雄), 필선 민응협(閔應協), 문학 이시해(李時楷), 사서 정뇌경(鄭雷卿),설서 이회(李禬) 및 익위사(翊衛司)의 관원 3명이 따라갔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1637년) 2월 5일 을해 3번째 기사

세자의 수행단 맨 앞에 남이웅이란 이름이 보이죠. 재신(宰臣)은 당시 정2품 이상의 최고위 관리였습니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올빼미>는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돌아온 이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죠. 남이웅은 세자를 모시고 직접 청나라 심양(瀋陽)에 다녀온 만큼, 그 시대를 눈앞에서 똑똑히 목격한 인물이었습니다.
영화 〈올빼미〉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소현세자


자식도 없이 남은 가족이라곤 남편밖에 없는 조씨 부인의 심경이 어땠는지는 이후의 일기에 절절하게 담겨 있습니다. 어쩌다 남편이 보낸 편지가 오면 반가워 어쩔 줄 모르고, 타향살이에 필요한 옷가지와 먹을거리를 바지런히 챙겨 인편에 보냅니다. 눈물로 얼룩진 나날 속에서도 먼저 죽은 아들과 며느리 생일이며 제사까지 빠짐없이 챙깁니다. 그 와중에 첩이 낳은 아들을 보곤 "얼굴이 영감을 닮은 곳이 많다."며 측은함을 느끼기도 하죠.

그리고 그해 5월부터는 유난히 '꿈'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꿈에서 그리도 자주 만났을까요.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꿈에서 남편을 만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남편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편지로 알려오길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꿈에서 남편을 만나고 나면 무사히 돌아올 징조라며 거듭거듭 희망을 품습니다. 그 해가 다 가도록 말이죠.

이해도 거의 다하여 가니 심양 행차는 어느 날에나 기대할까? 아침이면 햇님을 우러러 빌고 달 밝을 때면 달님에게 빌며 천지일월성신(天地日月星辰)께 절하여 빈다.

그러나 나의 정성이 부족한가? 하늘께서 감동을 아니 하시는가? 평생에 하느님을 원망하는 말을 입에 내지 아니하고 평생에 사나운 일을 아니 하려고 하였는데도 한 자식도 없고 이렇게 매양 가슴을 썩이며 지내니 하늘이시여 높으시나 높으시나 살펴보소서.
- 1637년 11월 22일의 일기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두께를 생각하면 솔직히 인간적으로 원망을 쏟아낼 법도 한데, 일기 어디에도 자기 신변을 비관해 끝없는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구절은 안 보입니다. 도리어 꿈에서나마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남편을 만나면 그렇게 흐뭇해할 수가 없죠.

조씨에게 '꿈'은 그 힘겨운 나날들을 견디게 해준 유일한 지푸라기였을 겁니다. 남편이 무사히 살아서 돌아오길 꿈꾸며 꾸는 꿈. 그 꿈이 있었기에 60대 중반의 노부인은 혼자서 만만치 않은 살림을 꾸려가며, 멀리서 고생하는 남편 뒷바라지에, 제사와 생일 등 집안의 대소사를 혼자 힘으로 묵묵히 치러내며 기다립니다.

《숭정 병자일기(崇禎丙子日記)》는 그 시대의 구어체에 가까운 우리말로 기록돼 국어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지나 1638년. 드디어 남편이 귀국할 것이란 소식이 전해지자 조씨의 마음은 더 부산해집니다.

영감께서 나오신다는 기별이 없었을 때에는 아무런 바라는 것도 없었는데 유지(諭旨)가 갔다고 한 후에는 마음이 도리어 어린아이 같아져서 날마다 바라는 마음이 끝이 없다.

요사이는 꽃 피는 계절은 벌써 지나고 녹음이 어렸으니 해마다 시절은 때를 잃지 아니하는데 죽은 자식들은 정령이나마 있으면 꿈에라도 나를 찾아보지 않으랴 한다. 이렇게 외롭고 고단할 때에는 더욱 더욱 생각하고 설워한다.
- 1638년 3월 22일의 일기

참 진솔하죠. 기별이 없었을 때는 안 그러더니 임금이 귀국 명령서를 보냈다고 하자 마음이 어린아이 같아졌다고 썼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죽은 자식 생각에 또 하염없는 슬픔과 고독에 잠기죠. 그 뒤로도 남편은 계속해서 꿈에 등장하고, 부인은 변함없는 긍정의 자세로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다립니다.

그 간곡한 정성이 통했던 걸까요. 남편 남이웅은 떠난 지 1년 반만인 1638년 5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옵니다. 먼저 실록의 기록부터 봅니다.

세자 빈객 남이웅이 심양으로부터 돌아왔다. 상이 불러 보고 하문하기를,

"세자가 돌아올 시기를 알아내지 못하였는가?" 하니, 이웅이 아뢰기를,

"저들은 법령이 엄하여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바깥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므로 실로 알아낼 방도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1638년) 5월 18일 경진 2번째 기사

무사히 귀국한 남편 남이웅은 부인 조씨에게 연락해 이제 서울 집으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조씨는 식솔들과 함께 '신줏단지' 모시고 남편을 만나러 집으로 가죠. 그날의 일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가까스로 배에서 내려 신주를 모시고 집에 들어왔다.
영감을 뵈옵고, 일가 모든 분이 기운들이나 그만하여 계시니 온 집안에 이런 경사가 없으나, 육 년 만에 내 집에 돌아오니 아기네 있던 곳의 종적을 보는 듯하니 반갑고도 설운 정을 어디다 비교하리.
요사이는 하도 주위가 번잡하여 기록하지 못하겠다.
- 1638년 6월 2일의 일기

남편이 무사히 돌아온 이후 한동안은 문안오는 손님들이 워낙 많았던지 "주위가 어수선하여 다 기록하지 못하겠다.", "요즈음 일은 다 기록하지 못하겠다." 이런 구절들이 많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조씨는 집에 누가 들어오고 나갔는지, 술은 몇 잔을 마셨는지까지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적었습니다. 남편 출퇴근 챙기고, 크고 작은 제사와 생일 치르고, 수시로 아파서 몸져눕는 일상으로 다시 돌아온 거죠.
남이웅 초상. 왼쪽은 중국본, 오른쪽은 조선본.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일기는 2년을 더 지나 1640년 8월 9일 자로 끝납니다. 뒷부분 글자가 지워져 알아볼 수 있는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맑고 바람이 불었다."

남평 조씨가 4년 가까이 쓴 《숭정 병자일기(崇禎丙子日記)》, 흔히 '병자일기'라 부르는 이 일기는 한글로 기록한 개인 일기로는 오늘날 전해지는 가장 이른 기록이자 분량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귀중한 작품입니다. 정부나 고위 관리가 남긴 기록에선 볼 수 없는 병자호란 시기의 이면을 보여주는 독보적인 기록이기도 하죠.

전란 속에서도 어김없이 일상을 꾸려나간 한 여성의 녹록지 않았던 세상살이는 안타까움과 더불어 깊은 감동을 줍니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박경신 전 울산대 교수의 역주본 《병자일기》(나의시간, 2015)를 읽었습니다. 일기의 주인공 조씨는 참 고운 마음씨를 가진 분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3년 10개월 치 일기 어디에도 모난 구석 한 군데 보이지 않습니다. 이 일기는 1990년 1월에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확인된 일기 주인의 이름은 조애중(曹愛重)입니다.
https://news.kbs.co.kr/special/danuri/2022/intro.html

김석 기자 (stone2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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