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세난 시대…“재직증명서 좀 봅시다” 세입자가 집주인 면접
서울 강남구의 40평대 아파트를 보증금 21억원에 전세로 임대 중인 직장인 박모(54)씨는 지난달 계약서를 쓰러 갈 때 회사 재직 증명서와 국세·지방세 완납 증명서를 챙겨갔다. 세입자가 “거액의 보증금을 믿고 맏겨도 될지 임대인의 재무 상태를 확인하고 싶다”며 증빙 서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전세를 내놓은 지 거의 한 달 만에 어렵게 잡은 세입자였다”며 “2년 전에는 세입자를 골라가며 받았는데 이번엔 세입자 눈치를 봤다”고 말했다.
‘집주인은 갑, 세입자는 을’로 통하던 전세 시장의 판도가 뒤집히고 있다. 2020년 7월 주택임대차보호법(임대차 3법)이 개정되고 2년간 묶였던 전세 매물이 작년 하반기부터 시장에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높은 대출 금리로 전세 수요가 줄고 전셋값이 급락하면서 세입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세입자가 집주인을 면접 보듯 심사하는가 하면, 집주인이 세입자의 대출 이자를 월세처럼 다달이 지원하거나, 인테리어를 새로 해주는 경우도 흔하다. 계약 기간이 남았는데 세입자가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요구하고 있어 난감해하는 집주인들의 사연도 인터넷 커뮤니티에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甲乙 뒤바뀐 전세 시장
집주인들은 전세 세입자를 구하기 위해 각종 ‘당근’을 제시하고 있다. 가장 흔한 것이 내부 수리나 가전제품 교체다. 작년 10월 분당신도시의 한 아파트에 전세 세입자를 들인 주모(43)씨는 에어컨과 화장실 변기·수도꼭지를 모두 교체해줬다. 당초 중개업소에 매물로 내놓을 때만 해도 수리 계획은 없었는데, 한 달 넘도록 집을 보려는 사람이 안 나타나자 마음을 바꿨다. 그는 “세입자가 원하는 대로 고가 사양으로 수리해 줬다”며 “300만원 넘는 돈을 썼지만, 세입자를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는 다른 집주인을 보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세입자를 붙잡기 위해 보증금을 낮추거나 세입자의 대출 이자를 지원하는 ‘역월세’도 확산하고 있다. 부동산 중개업체 집토스가 수도권 아파트 전·월세 갱신 계약을 분석한 결과 작년 10~11월 계약 중 보증금을 낮춘 감액 거래의 비율은 13.1%로 직전 분기(4.6%)의 3배 수준으로 높아졌다. 부동산R114 집계에 따르면, 작년 서울 아파트 전세 거래 중 18%가 2년 전에 비해 보증금이 낮아졌다. 서울 성동구에서 영업 중인 한 공인중개사는 “현금이 없어 보증금을 시세만큼 낮출 수 없는 집주인 중에선 세입자에게 역으로 매달 얼마씩 주는 경우도 있다”며 “보증금 1000만원당 4만~5만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세입자가 계약 기간 중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통보하는 바람에 집주인들이 곤경에 처하는 경우도 잇따르고 있다. 2020년 개정된 임대차보호법에선 갱신 계약의 경우에 계약 기간(2년) 중이라도 세입자가 3개월 전에 통보하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했다. 세입자를 보호한다는 취지였지만, 지금 같은 ‘역전세 상황’에선 세입자들이 집주인을 압박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어느 한 쪽만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게 한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전셋값이 치솟던 시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요즘 같은 상황에선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갭투자자 매물 폭탄 터지나
전셋값 급락을 견디지 못해 집을 급매로 던지는 집주인도 있다. 전세 끼고 집을 샀던 갭 투자자들이 보증금을 돌려주기 어려워지자 시세보다 싸게 처분하는 것이다. 서울 송파구의 한 공인중개사는 “시세보다 2억~3억씩 낮은 가격에 나오는 매물들은 2~3년 전 갭 투자로 산 것이 많다”며 “전셋값 하락이 장기화하면 이런 매물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실이 국토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서울에서 거래된 주택 중 갭 투자 비율은 2018년 14.6%에서 2021년 41.9%로 치솟았다. 박원갑 KB국민은행 수석 전문위원은 “정부가 갭 투자자를 보호할 이유는 없지만, 집값 경착륙을 막기 위한 조치는 필요하다”며 “1주택자나 등록 임대사업자에 한해 제한적으로라도 퇴거 자금 대출 문턱을 낮춰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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